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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도착적 러브스토리만 강화된…

역사에서 가시를 뽑고 당의를 입힌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혹평함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에 대해선 칭찬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아카데미 수상은 물론이고, “고통의 역사에 구경꾼의 역할을 묻다”(<씨네21> 695호, 김용언)라는 장문의 찬사나 697호 전영객잔 김소영의 평문은 모두 영화의 정치적인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아카데미 수상이야 상관없지만, 두 평문의 상찬은 과잉으로 느껴진다. 김소영은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상세한 묘사들이 참조, 인용되고, 콘텍스트로 기능해야만 그 역사적, 정치적, 사적 의미들이 풍부해진다”고 전제하면서, 소설 속 “전후 세대의 고백”을 길게 인용한다. 김용언 역시 소설이 “특권적으로” 구사한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길게 싣는다.

그러나 여기엔 ‘곤란한 문제’가 있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에서 영화만으로 주제를 충분히 감지할 수 없을 때, 영화적 형상화의 부족을 지적하거나 영화에 실제로 구현된 메시지에 한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영화 속에 구현되지 못한 메시지를 원작 소설을 참고하여 마치 영화에도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 말이다. 영화만 놓고 보았을 때, <더 리더>의 남자주인공으로부터 전후 세대 지식인의 독백을 추출하기는 어렵다. 영화 <더 리더>는 원작이 “소설의 특권”을 활용해 담아낸 전후 세대의 문제의식을 ‘영화의 형식을 제대로 활용치 못하고 갇혀버렸거나 할리우드영화적 굴절과정에 의하여’ 탈각해버린 텍스트이다. 그 결과 오로지 러브스토리, 그것도 ‘소심남의 도착적인 러브스토리’만 강화된다.

그 남자의 사정?

원작이 훌륭한 점은 소년과 여인의 정사와 전범재판이라는 상이한 두 이야기를 소년의 주체적 내면을 고리 삼아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년의 시점을 취하면서도 그의 내면이 무엇인지 전혀 묘사하지 못한다. 첫째, 그가 한나의 진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교수에게 어정쩡하게 말하다가 그녀를 만나보라는 말에 “어떻게 그녀를 만나냐?”고 반문하는 그의 고민은 정확히 무엇인가? 원작엔 그녀가 감춘 진실을 공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묻는 철학자 아버지와의 면담장면이 나온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품위에 관한 윤리문제로, 주인공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개입해선 안된다는 조언을 듣는다. 그러나 영화에선 그가 어떤 윤리적 판단을 경유하였는지 알 수 없다. 교수랑 만나고 면회를 신청했다가 취소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법대생과 섹스를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시퀀스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가 그녀와의 대면을 두려워하며, 그녀에 대한 애욕을 법대생에게 풀었고, 아마 그 학생과 결혼했다가 딸을 낳고 이혼했을 거라는 애정사뿐이다.

둘째, 재판에 대한 주인공의 견해는 무엇인가? 영화엔 재판에 관한 두 가지 논평이 나온다. 첫째는 법대 교수의 것으로,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며, 피고들은 당시 법의 위법성 여부에 따라 “편협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법실증주의적 입장이다. 이는 법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지적이다. 둘째는 ‘열혈청년’의 것으로, 전쟁 당시 수천개의 수용소가 있었음에도 생존자의 저술에 의해 오직 이들만 기소된다는 건 ‘면피행위’에 불과하다며 분노한다. 이 역시 재판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다. 주인공은 어떤 입장인가? 평자들이 인용한 원작의 비판적인 성찰은 한마디도 발화되지 않으며, 그는 이 자리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추궁당하다 부인한다. 즉 재판에 대한 그의 유일한 견해는 “나는 그녀를 모르오”이다. 이로써 그가 그녀의 문맹을 밝히지 않은 이유도 1차원적으로 해명된다. 단지 그녀와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결국 영화가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전범재판을 둘러싼 정치적 사유나 자유와 품위에 관한 윤리적 사유가 아니라, 청소년기에 연상녀와의 통정 경험을 발설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로 축소되고 만다. 이는 그가 생존자와 제 딸(원작에는 안 나온다)에게 ‘주책없이’ 고해하는 장면을 통해 마무리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대체 왜 그들이 그런 민망한 고백을 들어야 하는가? 이유는 소심남의 고해가 핵심이 되어버린 이 영화에서 이들이 마지막에 등장하기 때문이며, 고해는 관객을 향한 것이다.

그녀의 죄목을 상기시킬 자격이 있는가

1995년 아침 벌거벗은 여자와 ‘당신이라는 남자, 마음을 여네 마네’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김용언의 도저한 주장과는 달리 ‘러브스토리’이다(유지나는 “인생의 목적은 바로 이런 깊은 사랑인 것을!”이라며 찬탄하며 별 다섯을 주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인생의 목적이 될 만하기는커녕 몹시 도착적이다. 소년은 꽤 주체적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제안하고, 우표를 팔아 비용을 마련하는가 하면, 엄마로 아는 이 앞에서 보란 듯이 키스를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몇년 뒤 그는 소심남이 되었다. 갑자기 떠난 그녀에 대한 미움을 고스란히 지닌 채 나치부역이라는 죄목에 가위눌려, 대면은 엄두도 못 내고 혹 그녀와의 관계가 탄로날까 전전긍긍이다. 그는 자기 욕망에 따른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부인하거나 전치시키기에 급급하다.

전치된 욕망으로 만난 여자와의 결혼생활이 실패하자, 이 모든 것이 과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과거를 복기(rewriting)한다. 그는 한나와의 데이트의 한 순서였던 책읽기를 반복하여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보낸다. 4년 뒤 그녀가 글을 익혀 편지를 하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신나게 마스터베이션을 하다가 이불 속에서 처녀 귀신의 응답을 들은 것마냥. 그는 그녀의 편지에 답을 하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의 행위는 살아 있는 소통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강박반응이다. 그에게 그녀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과거의 존재로, 고착된 강박행위의 배설구인 교도소 담벼락으로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 아뿔싸 그녀가 석방되어 백발의 그녀를 만나야 한다니, 이는 도착놀이의 끝을 의미한다. 그녀와의 면회에서 그는 해서는 안될 말을 한다. 수년간 과거 데이트의 의식을 반복함으로써 무기수인 그녀와 일면적 관계 맺기를 해온 그가 “옛날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녀로선 당연히 과거 데이트냐며 반색한다. 그런데 그는 “나치 시절”을 되묻고 있다. 아니, 왜? 그는 어떤 자격으로 무슨 대답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는 희생자도, 재판부도, 사제도, 기자도 아니다. 옛 애인이자 사랑행위의 일부를 12년간 복기해온 그가 첫 대면에서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쌩까기’, 즉 그녀에게 죄목을 상기시켜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정을 떼려는 것이다. 소년과의 관계에서나 재판과정에서나 오롯한 자존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거나 변명하려 들지 않던 그녀는 존엄하게 죽어버린다.

아름다운 마녀, 한나가 불러들인 곤경

도착적 러브스토리 <더 리더>에 가치가 있다면, 이는 오로지 한나의 재판장면에 있다. 감독이 소년의 병명을 성홍열로 바꿈으로써 은근히 끌어들이는 루이 말 감독의 <라콤 루시앙> 등 나치부역자들과 함께, 한나는 인류의 도덕성에 균열을 낸다. “수용소 근무자 8천명 중 19명이 기소되고, 6명만이 살인혐의를 받았다”는 대사처럼 독일 법정은 유대인 학살에 관대했다(1962년 유대인 4만명을 학살한 데 관여한 펠렌츠는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다). 재판에서 중시된 건 의도성 여부였다.

판사가 묻는다. “상관의 명령에 의해?” 그녀가 ‘문명’을 익힌 자였다면 그것이 자신을 놓아주는 말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생’의 그녀는 ‘자신의 임무’였다며 자발성을 드러낸다. 재판부가 원한 건 이들이 피동적 존재로 주체가 아니었다는 것, 즉 악은 맨 꼭대기 히틀러 하나였고, 동조하고 방관했던 우리 모두는 역사의 희생자라는 것을 추인하고 재빨리 봉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임무에 충실하느라 그랬다, 저들도 다 같이”라고 답함으로써 나머지 피고는 물론 방청석과 관객까지 당황시킨다. 심지어 재판부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묻는다. 나머지 피고와 재판부는 서둘러 자신이 그녀와 다름을 선언해야 했다. 그녀에겐 자발성과 책임성이 인정되어 이례적인 중형이 언도된다. 그녀가 책임자의 죄까지 쓴 것은 문맹을 밝히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혼자 한 건 아닐지라도) 그 일을 한 건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판결날 나치제복과 유사한 옷을 입어 더욱 공분을 산다.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죄의식을 치유하기 위해 행해지는 마녀재판에서 그녀는 확신범 마녀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 것이다. <그랜 토리노>의 노인은 “상관의 명령에 의해, 살기 위해” 살인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냐는 신부의 말을 단호히 부인한다. 그는 ‘주체’로서 피를 묻혔음을 회피하지 않고, 연민이나 사면이 아닌 ‘죽음을 통한 속죄’를 택한다. 한나 역시 남자에게 나치부역자로 재호명받자 죽음으로 답한다.

그녀에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묘사된 지나치게 성실하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전차 한칸의 근무지를 벗어나지 않고 소년을 외면한 고지식함은 나치경비원으로서 근무태도를 짐작게 해준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나 ‘무사유’와 같은 개념이 알기 쉽게 인격화된 인물이다. 그러나 케이트 윈슬럿의 몸을 입은 한나는 때때로 그 이상의 숭고함을 뿜어낸다. 영화의 곤경은 여기에 있다. 그녀의 문맹은 ‘무사유’나 ‘무관심’을 ‘무식’의 문제로 속류화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관객의 무의식에 은연중에 용서를 들이민다. 게다가 독일어가 아닌 영어가 구사되는 영화는 실제 역사의 리얼리티를 한 꺼풀 벗겨낸다. 영화가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역사의 난제를 보여주는 건 가치있다. 그러나 역사의 난제에서 가시를 뽑고 당의를 입히는 건 옳지 않다. <더 리더>가 그러한 혐의로부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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