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을 볼 때마다, 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서 천천히 걷는 아버지들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보다 먼저 깨어나 의복을 추스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주의가 종일 호흡처럼 몸에 배어 있으며, 일과가 끝난 뒤 뜨뜻한 정종 한잔을 행복하게 음미하는 노신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많은 경우 진실이나,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역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14년 전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등 뜻을 세운 영화과 교수들의 청을 받아들여 부산국제영화제의 선장이 된 이래, 그는 가공할 만한 성실성과 매력으로 쉽지 않은 항해를 인도했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스타가 되었다. 우리를 멈칫하게 하는 대목은 김동호 위원장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른에게 따라붙는 존경뿐 아니라 ‘사랑’ 비슷한 것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여러 정권에 걸쳐 27년의 문화공보부 관료 생활과 영화진흥공사 사장, 공륜 위원장을 지낸 철저한 주류 엘리트 관료 출신인 김동호 위원장은, 얼핏 상극으로 보이는 반골 기질 세고 자유분방한 많은 영화인의 마음을 얻었다. 해외 영화제를 방문한 한국 영화인과 기자는, 현지에서 ‘미스터 킴’의 도착 일정을 문의하는 외국 영화인들과 틀림없이 마주친다. 홍콩에 근거를 둔 이리지스터블 필름(Irresistible Fims)의 프로듀서 로나 티는 “미스터 킴은 한국의 가장 훌륭한 외교관일 것이다. 영화제 관련 거물들은 누구나 적이 있게 마련인데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고 장담한다. 이쯤 되면 ‘마성(魔性)의 위원장’이라는 애칭을 헌정하고 싶어진다.
1961년 문화공보부 7급 주사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동호 위원장은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으나 이상적 공무원상을 미리 그린 적은 없다고 회고한다. 그의 규범은 상식에서 나왔고 실천력은 업무를 수행하며 배가됐다. “공보부의 업무라는 것이 문화예술계, 종교계, 언론계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죠.”처음부터 오늘날까지 김동호 위원장은 예술가와 수용자에게 효율적으로 봉사하는 일을 중대한 직분으로 믿고 근면하게 걸어왔다. 전문가 집단 의견을 수렴해 문화 정책을 세우고, 인맥과 설득력을 총동원해 예산을 확보하고, 실행 단계에서 애초 기획이 갈지자로 걷지 않도록 살피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업적을 쌓아왔다. 주변의 증언과 자료로 종합해본 김동호 위원장의 일 방식은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의 반대말이다. 요컨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자기 쇄신을 꾀했으며 조직의 생리에 휘말려 개인의 품성을 망그러뜨리지 않았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인간의 마음을 잡는 77가지 버릇>류의 책을 읽는 기분을 피할 수 없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 첫째, 김위원장은 사람의 경중을 가려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스타와 독립영화인, 중앙일간지와 학생기자를 대하는 태도에 차등이 없으며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는 일이 없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최선을 보여주고 진심을 들려주도록 북돋울 게 분명하다. 둘째, 작은 일을 다정히 챙긴다. 부산영화제 스탭들은 직원의 생일 케이크를 일일이 챙기는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해 케이크 증정을 제도화(?)했다. 한 영화평론가는 새로 펴낸 책을 그에게 보냈다가 얼마 뒤 꼼꼼히 읽은 독후감이 담긴 편지를 받은 일을 잊지 못한다. 셋째, 할 수 없는 일은 약속하지 않고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려고 애쓴다. 국내외 영화인의 다양한 부탁을 경청하고 접수하되 섣부른 약속으로 실무진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가 없다.
인터뷰 자리에서 김동호 위원장은 과거의 일에 관한 심경을 토로하거나 몇 마디로 사태를 뭉뚱그리는 단언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반면 언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고 몇시까지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기막히게 명징했다. 배려는 기억에서 나온다. 48년간 기록을 쉬지 않았다는 김 위원장이 보여준 수첩은 검정, 빨강, 파랑으로 구분된 단정한 펜글씨로 빼곡했다. 그를 원하는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꽉 찬 수첩. 그것만큼 김동호 위원장을 행복하게 만드는 주술은 없어 보였다.
-지난주 오키나와국제영화제에 다녀오셨죠? 즐거우셨나요? =땡볕에서 개막식을 길게 해서 조금 애를 먹었지요. 허허. 심사위원장으로 초청받았기 때문에 하루에 네편씩 이틀 동안 심사를 하는 꽉 찬 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폐막식에서 내년 영화제에는 자원봉사자로 초청해주면 즐겁게 다시 오겠다고 했죠. 그래도 바다로 이어지는 길에서 조깅은 했어요. 어디로 출장을 가건 테니스화와 트레이닝복은 늘 가져가요.
-해외 출장이 일년의 절반 이상이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운동할 방도가 없으시겠죠. 워낙 해외를 자주 나가시다보니 특별히 가족 선물을 챙기지는 않으실 것 같네요. =아예 처음부터 선물 같은 것은 사지 않았어요. 집사람도 아시아 태평양 약사회의나, 세계 약사회의 같은 임상약학회의에 참석하느라 일년에 두어번 밖으로 나가는데, 피차 안 주고 안 받기로 했습니다. (웃음) 다만 손자들이 태어나고 2, 3년 동안 아이들 옷가지는 조금 사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지역명이 새겨진 재미난 디자인의 컵을 하나씩 사와서 이젠 꽤 모였어요. 손님 오실 때 그 컵으로 커피나 차를 내놓거나 나중에 진열하면 좋겠다 싶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컵으로 드실래요, 라스팔마스 컵으로 하실래요?” 이렇게 되는거군요. (웃음) 위원장님은 전용 차량을 두지 않고 평소에 택시를 타고 업무를 보시는 걸로 압니다. =예. 그리고 출근길에는 광나루역에서 5호선을 타고 광화문에 내려 효자동 사무실까지 걸어옵니다. 제가 나이가 있어서 차비는 무료죠. (웃음) 그러다보니 언젠가 부산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타고 무심코 김포공항까지 갔는데 지갑을 잊고 간 거예요. 하는 수없이 가끔 구두를 닦아주셨던 미화원님한테 3만원을 빌려 갖고 부산으로 갔어요. 돌아오는 길에 영화제 직원들에게 돈을 꾸어 이자까지 쳐서 갚아드렸죠. 허허. 워낙 출입이 잦으니 김포공항과 김해공항에서는 신분증이 없어도 들여보내주세요.
영화제 게스트 초청은 아무리 바빠도 확인
-며칠 전에 방한한 줄리엣 비노쉬를 만나셨는데요. 역시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을 위해서였나요? =예전에 <빨간풍선>(비노쉬의 출연작)을 연출한 허우샤오시엔 감독 소개로 칸에서 만난 적은 있습니다. 제가 본 비노쉬의 영화 중에서는 <초콜렛>을 제일 좋아합니다. 올해 영화제에 초청했더니 파리에서 약속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어렵고 내년에는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중에 들으니 기자회견에서도 부산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네요. (흐뭇한 미소)
-김동호 위원장님께서는 영화제 관련 실무는 전적으로 전문 스탭에게 일임하지만 각별히 신경쓰고 실수가 없도록 엄격히 챙기는 분야가 초청이라고 들었습니다. 영화제에서 초청이 갖는 중요성을 크게 보시나봅니다. =영화제의 평가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물론 상영작들이지만 그 못지않게 영화제에 온 게스트들이 받고 돌아가는 인상과 이미지가 크다고 보기 때문에 의전이나 초청에 관한 업무는 아무리 바빠도 확인을 합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 한분께 들은 일화가 있습니다. 2005년 10회 영화제를 앞두고 개·폐막식 기획에 관해 여러 업체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왔는데, 각 업체들이 치러낸 과거 행사의 세부를 상기시키면서 초토화를 하시는 바람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하더군요. 각 회사의 예전 작업을 검토하신 건가요? =아무래도 10주년이다 보니 내실있게 하자는 입장이어서…. (웃음) 저는 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공식, 비공식 이벤트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기 때문에 당시 인상을 머릿속에 담아두거나 메모합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문제를 지적하지는 않고 기억했다가 다음해에 준비할 때 상기시키죠. 영화 외 문화예술 관련 행사를 볼 기회가 자주 있는데 그때마다 개·폐막식의 진행과 무대장치, 진행이 매끄러운지 축하공연 내용은 어떤지 항상 관심을 갖고 보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을 10회 영화제 무렵에 처음 하셨습니다. 이용관 중앙대 교수와 나란히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바뀌고 나서도 물러날 의사를 밝히시곤 했는데, 최근에 주변의 간곡한 만류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1, 2회를 치른 뒤 부산 정서나 이런저런 이유로 저의 집행위원장직 수행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라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그런데 3회 영화제 지나고부터는 그런 이야기들이 잦아들었죠. 그리고 2005년 10회 영화제에 맞추어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영화제 숙원사업인 전용관을 포함한 영상센터 부지 선정과 설계 공모에 걸리는 과정이 길어졌지요. 센터 기공에 맞춰 그만두는 게 적기가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러다 마침내 2008년 영화제 기간 중 영상센터 두레라움이 기공을 했고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제의 대외적 위상도 정립됐고 공동집행위원장제로 2년을 보내면서 내부적으로도 운영이 안정됐으니까요. 올해 초 영상센터 시공사와 감리회사도 결정됐어요. 그래서 지난 2월25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총회에서 올해를 끝으로 물러날 의사를 밝힐 계획이었고 일간지 전화 인터뷰까지 해놓았는데 직전에 부산 시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반대의사에 부딪혀 일단 내년까지 1년을 연장해 일하게 됐어요. 내년이 15회니까 숫자상으로도 괜찮아요. (웃음)
피난하면서 처음 부산땅 밟아
-강원도 홍천이 고향이지만 세살 때 서울로 이사하셨으니 기억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대여섯살 때 서울 충신동에 살았는데 장마철에 석축이 무너져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나서 원남동으로 이사를 했는데 초등학교 입학 전에 동네 다니면서 싸움도 좀 했고…. (웃음) 1945년 해방이 될 때 1학년이었는데 종전(終戰)에 대비해 시민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하는 바람에 고향 홍천의 명덕국민학교로 잠시 전학했다가 2학년 때 다시 재동국민학교로 복교했습니다.
-헤아려보면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6·25 전쟁으로 피난살이를 하신 셈인데요. =1950년 신학기 개학은 6월이었어요. 경기중학교에 들어가 25일을 다니고 전쟁이 났죠. 1·4 후퇴 때 연고자도 없는 부산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남아 정리를 하고 오신다고 했고 저는 어머니와 함께 인천이 함락될 때 인천에서 화물선을 타고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갔어요. 누님은 친구 가족에게 얹혀 따로 내려갔고요. 어머니와 저는 바로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갔고 각자 행상을 했습니다. 국제시장에서 담배니 드롭스니 물건을 받아다 목판에 이거나 길가에 늘어놓고 팔았습니다. 4, 5개월 뒤에야 식구들 모두 재회했어요.
-당시에는 40여년 뒤 부산이라는 도시와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상상도 못하셨겠습니다. =그렇지요. 피난 생활 4년을 하며 안 돌아다닌 데가 없으니 부산의 옛날 지리는 잘 압니다. 특히 남포동은 행상하느라 물건을 받아오던 국제시장이 있던 곳이죠. 다들 돈이 없으니 당시 학생들은 무료로 통학을 했어요. 차비를 안 받은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트럭을 집어탔다가 내려서 다시 전차에 몰래 올라타고 하는 식으로 갈아탄 거죠. (웃음) 지금 부경대가 있는 용호동에 살면서 끝에서 끝인 서대신동 구덕산 밑의 학교로 통학했는데 수십번씩 그렇게 차를 갈아타며 다녔어요.
-이제는 부산 시민들도 위원장님께 정이 많이 든 것 같습니다. 부산에서도 차없이 업무를 보러 다니세요? =공항에 내리면 택시 기사님도 아는 척해주시고 음식점에서도 사인 요청을 받는 일이 있어요. 영화제 초기에는 차량이 전혀 없어서, 필름 나르기 위해 승합차가 한대 필요하다고 예산을 올렸더니 이것 말고 위원장용 승용차를 하나 마련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고 그것은 필요없다고 해서 승합차부터 샀는데 공동위원장 체제로 오면서 승용차 한대를 임대했지요. 운전은 직원들이 돌아가며 맡아요.
술은 세살 때부터? 끊은지는 3년3개월
-2006년 1월부로 금주를 하셨습니다만, 위원장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술 이야기를 피할 방법은 없네요. 음주를 상당히 이르게 시작하셨다는 풍문도 있던데요? =글쎄요. (장난꾸러기 미소) 일설에 의하면 원래 저희 할아버지는 약주를 전혀 안 하셨는데 아버지가 하도 많이 드셔서 거기 덴 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려서 술을 먹이면 장성해 안 먹는다는 이야기를 믿고 제게 세살 때부터 술을 먹였다던가…. (좌중 폭소) 그래서 오히려 내성이 생긴 게 아니었나 싶어요. 예전에는 집에서 술을 담갔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 홍천에 잠시 살 때는 뛰어놀다 들어오면 방 안에서 발효 중인 술을 들이켜곤 했어요. 술지게미가 참 달고 맛있거든요. 아버님 친구 분들이 놀러오시면 정종을 주전자에 데워가는 도중에 맛을 보고 가져다드렸죠. 그러니까 역사가 꽤나… 허허허. 2006년 1월1일에 금주했으니 3년3개월이 됐네요. 우리 나이로 일흔이니 한두해라도 더 살자면 이대로 안되겠다 싶어 전날 송년회까지 왕창 먹고 딱 끊었어요.
-술이 세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이지만, 흠뻑 취하신 모습을 못 뵈어 그런지 어디까지나 술을 만남의 도구로 좋아하실 뿐 술 자체에 사로잡힌 주당은 아니라는 짐작도 들었습니다. =집에서도 한번도 혼자 마신 적은 없어요. 제사도 무척 많은데, 제주(祭酒) 음복도 딱 한잔하고 버려요. 대신 누구랑 둘이 술을 놓고 마주 앉으면 반드시 끝장을 보죠.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직후 1961년에 문화공보부 주사보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어요. 공무원을 생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느 면에서는 아버지의 뜻이었지요. 광산 사업을 하셨던 터라 관리의 파워를 많이 느끼셨을 테고요. 사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 못했어요. 법학과쪽에는 정말 취미가 없었죠. 욕심만 많아서 천문기상학이니 해양학, 지리학 같은 학문을 하고 싶어 했어요.
-듣고 보니 모두 더 넓은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들이네요. =하긴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지 않고 세계지도를 혼자 그렸으니까요. 지금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런 점에선 인연이 있었던 건지. 한문학이나 건축도 고려했는데 집에서 계속 권하시는 바람에 법과대학을 지망했습니다. 수학이나 지리는 괜찮게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장사하고 돌아다니느라 영어의 기초를 닦지 못해 영어 과목이 특히 자신이 없었어요. 나머지 과목을 영어 점수로 벌충했죠.
-대학 다니는 동안 내내 공무원이 되리라는 예감이 있었나요? =청량리 집에서 연건동에 있던 학교까지 늘 걸어서 통학할 만큼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졸업하면 취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어요. 고시는 생각도 못했죠. 3학년에 군대를 다녀오고 5·16이 일어난 직후 9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시 제일 먼저 난 취업공고가 국가재건 최고회의 요원 모집이었어요. 그런데 졸업예정자는 받아주지 않았어요. 받아줬다면 안기부 요원이 됐을지도 모르죠. (웃음) 다음으로 난 채용 공고가 문화공보부였고 합격했습니다. 순전히 우연인 거죠. 해운공사에도 합격했는데 둘을 저울질하다 역시 공무원이 낫겠다 해서 문공부에 들어갔어요.
-1974년 문화공보부에 재직한 시절에 동아 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신 적도 있는 걸로 압니다. 어떤 경위였습니까? =중앙정보부가 언론 관계 업무를 문공부로 넘긴 직후였어요. “너희 어디 잘해봐라. 맛 좀 봐라”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은 데모 기사가 신문에 못 나오던 때였는데 수원 서울 농대생의 시위가 <동아일보>에 1단 4행 정도로 기사가 났습니다. 그전에는 베트남 전쟁 참전에 비판적인 기사가 <한국일보>에 실린 일이 있었고요. 그 때문에 두 신문의 편집국장, 사회부장 등과 더불어 문공부 보도국장인 제가 불려간 것이죠. 밤중에 풀려나 이튿날 충무에서 열린 신문편집인 세미나에서 발제를 하기 위해 내려갔습니다만 <한국일보> 기자들이 농성을 시작하고 다른 신문도 가세하면서 세미나는 유인물로 대체하고 모두 올라와야 했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에도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8년 근무를 하셨는데 공무원으로서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고 느낀 고비는 없었나요. =글쎄요…. 1980년 당시에는 국제 교류국장으로서‘세계 시인대회’를 치렀지요. 집안이 어려워 사표를 내려고 한 적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빚이 저에게 넘어오면서 한동안 봉급이 압류됐거든요. 공직자로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어야 옳지 않나 고민했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실무자다”
-문화예술계를 상대로 일하면서 공무원에 대한 선입견과 반감도 많이 직면하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됐을 때에도 감독협회 등 영화인들이 낙하산 인사라며 반대하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때까지 전임 영진공 사장들은 주로 퇴역한 군인들이었어요. 제가 임명됐을 때 감독협회에서 반대서명을 냈죠. 정지영 감독이 저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는데 두달 뒤 상을 당하셨을 때 밤중에 안산까지 찾아갔습니다. 상가에 앉아 문상 온 영화인들에게 욕도 듣고 시비도 듣고 바라는 바도 들었죠. 하지만 그때 더 긴급한 문제는 영화진흥공사의 재원이 사라질 상황이었다는 점이었어요. 1985년 영화수입과 제작이 자유화되면서, 수입 쿼터를 주면서 영화사에서 1억원씩 받아 충당했던 영화지원 자금 및 공사 운영자금이 나올 데가 없어졌거든요. 감사원에서 영진공은 재원이 없으니 기구 자체가 존립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요. 문화공보부에서 8년 동안 기획관리실장을 하며 쌓은 예산 따는 노하우와 인맥으로 영진공을 존립시키는 것이 저의 급선무였어요. 그러고는 제도권, 비제도권 영화인들을 밤낮으로 만나 제일 시급한 현안이 종합촬영소 건립임을 파악하고 추진했죠.
-요컨대 영화인들은 환영하지 않고, 정부는 꼭 이 기구가 있어야 하는지 회의적인 상황이었다는 말씀이네요. 삐딱하게 보면 잠시 자리를 지키다 조직이 정리되면 나는 다른 부처로 이동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조금도 그런 생각은 없었나요? =일단 발령을 받으면 그 기관을 살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걸 성사시키고 활성화시키는 게 맡은 사람의 책임이지요. 거슬러 올라가면 1971년에 국내 국정 홍보를 총괄하는 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정부에서 새로운 국정지표로 ‘문예부흥’을 제시하면서 장기계획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어요. 당시만 해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있어도 문화개발 5개년 계획은 없을 때였죠. 한번 해볼 만하다고 여겨 “좋다. 행정고시 합격하고 배치된 신임 사무관 다섯명만 붙여달라”고 요청했고, 문예진흥 5개년 계획을 세웠어요. 그리고 기획관리실장으로서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미술관, 독립기념관의 개관 그리고 국립박물관을 옛 총독부 자리로 이전하는 일 등을 치러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영진공에 부임했던 터라 이번에도 영화계에서 필요한 일을 해내고 제도를 개선하고 싶은 집념이 좀 있었어요.
-내침을 당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성향이시군요. =그렇죠. 오기도 있고. (웃음) 문화공보부 일을 통해 형성된 성격이 아니겠는가 싶어요. 언론주무국장을 지낼 때도, 해직기자가 상을 당하면 친한 정도를 떠나 꼭 상가를 찾았습니다. 당시는 안기부가 그런 일을 주시할 때라 저도 위험할 수 있었겠지만, 뭐 관계치 않았어요. 개인적인 문상이니까요.
-문화부에서 차관까지 지내신 위원장님은 정계·관계·문화계에 두루 네트워크를 갖고 계십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출범을 추진할 당시 거의 매주 부산시청에 들어가 설명을 하셨는데 상급자에게 바로 말을 넣지 않고 말단부터 만나서 설명하고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며 설득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실무자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요. 실무자가 동의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잘 진행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차관을 지냈다는 사실을 떠나서 실무자를 먼저 만나고, 그 다음 사무관, 과장 이렇게 아래로부터 올라가면서 정부와 관계된 일을 풀어나갔습니다. 부산시의 경우는 제가 윗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지만요.
부산영화제 첫해, 프로그래머들 사재도 털어
-1992년부터 1993년까지 공륜위원장을 지내셨는데, 영화제를 운영하는 현재 심의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나요? =물론 좀 변했죠. 그때는 심의를 하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오히려 반대쪽 위치니까요. 그러나 공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저는 직전 4년간 영화진흥공사에 있었기 때문에 심의에 관해 굉장히 신축성있게 생각했어요. 그 결과로 전임자의 잔임 1년을 포함해 2년밖에 일하지 못했지만. (웃음) <쇼군 마에다>라는 영화가 위장한 일본영화인데 심의를 통과했다고 신문 사회면 1면에 기사가 났고 곧이어 <올리버 스톤의 킬러>가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심의를 통과했다는 뉴스가 사회면 톱에 올랐거든요. 두건이 연달아 터지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겠기에 “이것은 그만두라는 신호구나” 받아들이고 그날로 사표를 썼어요.
-1996년 영화제 출범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말리는 의견이 많았다는 회고담을 읽은 적이 있어요. 어떤 요지의 충고였는지 기억나세요? =제 개인의 행보에 대한 걱정이 많았죠. 문화공보부 출신 지인들은 영화계 생리를 좀 알던 사람들이라 젊은 사람들과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영화제를 한다니, 그게 성공하겠느냐. 공연히 빚만 지고 패가망신하지 않겠느냐고(폭소) 우려했어요.
-사재를 털어서 하는 일로 인식된 건가요? =실제로 첫해 부산시에서 3억원, 대우그룹에서 3억원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고 시작했는데 예산은 6월이 지나야 나오고 기업의 후원도 광고비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영화제 개막 즈음에야 돈이 나왔죠. 국회 예산결산위 수석전문위원을 거친 예산통이었던 당시 오세민 부산시 정무부시장이 재원 구하는 일을 도와주겠노라 하셨지만 잘되지 않아 사적으로 신용대출을 받아 빌려주기도 하셨어요. 저희야 뭐 신용대출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어서(웃음) 김지석, 이용관 프로그래머와 제가 카드가 구멍나도록 써서 충당했어요. 그렇게 초창기에 개인 돈을 각기 많이 쓴 셈이죠.
-부산영화제 일을 하기 전부터 공무원으로서 각계각층의 인간을 경험하셨겠지만, 이른바 전세계 ‘영화제 피플’들을 만나고 전에 못 본 특이한 부류라고 느낀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은 영화광이라 그렇게 여행을 많이 하면서도 다른 문화적 이벤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반면에 영화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보니 술 한잔만 나누면 훨씬 빨리 가까워지죠. 처음에 놀란 점이라면 뜻밖에 영화제 종사자 중 동성애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있었네요. 허허, 외국인들은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술이나 식사를 내겠다고 제의하는 경우가 없어 제가 한국식으로 접근하면 무척 좋아했어요. 1996년 1회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그해 5월 칸에서 점심 식사자리를 마련했는데, 낭트와 로테르담 집행위원장, 칸의 막스 테시에와 그 라이벌인 피에르 리시앵, 국제비평가협회 사무총장, <버라이어티> 기자 등 15명이 모였죠. 요즘도 칸영화제 기간 중 그렇게 사람을 모으긴 어려울 겁니다. 부산국제영화제 가능성에 대해 처음 자신을 가진 게 그 자리였어요.
배우 얼굴 잘 기억 못하는 게 최대약점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젊은 세대와 원로들, 관료와 예술인들 사이에서 가교 노릇을 맡아오셨습니다. 언젠가 “정부나 시 관계자와 친해야 (영화제의) 자율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단 친밀해져서 우리의 사정을 알게 되고 그 바탕 위에 정당한 주장을 하면 이해받기가 수월합니다. 예를 들어 부산국제영화제는 1회부터 장관이건 시장이건 개·폐막식에서 연설을 하지 않는 것으로 못 박았습니다. 2007년 대선 후보들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료들의 연설을 허락한다고 큰일이 당장 나는 건 아니지만 이것은 ‘문화행사’라는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뒤탈이요? (웃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요. 그런 갈등으로 퇴진하면 또 명예롭게 그만두는 것이니까요.
-배우들 얼굴을 잘 기억하시지 못하는 걸로 유명하신데요. =최대 약점이죠. 어느 해인가는 정우성씨를 몰라보고 파티에서 영어로 인사를 했지요. (폭소) 그래서 요즘은 사정을 알고 먼저 자기 이름을 대는 분들이 생겼어요. 서양 사람들을 만날 때도 이 사람이 저 사람인 줄 알고 한참 이야기하다보면 번지수가 틀린 경우가 있었어요. 전쟁 때는 걱정을 하기도 했죠. 아버지, 누나와 헤어져서 피난을 왔는데 내가 나중에 누나를 만나도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고요. (웃음)
-해외 영화제에 나가면 반드시 한국 영화인들과 취재기자들을 불러 한차례 한식집에서 밥을 사주십니다. 저 역시 한쪽에 낀 경험이 있습니다만 위원장님 사비로 식대를 지불하신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월급 받은 거 그런 데나 쓰는 거죠. 허허.
-하지만 봉급은 원래 그렇게 쓰라고 주는 건 아니잖아요? (웃음) =본래는 가계에 쓰라는 거지만. 다행히 아내가 벌고 있으니 저야 술이나 먹고 돌아다니는 거죠. 허허. 1967년에 결혼한 이래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한번도 없어요. 아내는 제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묻지도 않아요. 당시 공무원 봉급이라는 것이 보잘것없었으니 원래 돈 없는 걸 알고 결혼하기도 했죠.
-그런데 술값, 밥값을 꼭 본인이 내시는 까닭이 뭔가요? 공무원이라 오히려 대접받기를 더 경계하는 습관이 굳어지신 걸까요? =남한테 피해를 줘선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지 않나 싶어요. 공무원 시절 한 출판사 대표가 같은 카페 다른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저를 보고 술값을 내고 간 적이 있어요. 카페 사장을 크게 나무라고 돌려줬죠. 지금도 술집에 가면 제 카드를 먼저 맡겨요. 드물게 영화인들이 집을 찾아올 때가 있는데 술이라도 한병 들고 오면 문 앞에 놓아두었다가 도로 갖고 가게 합니다. 이제는 알고 아예 안 가져오죠.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공무원의 도리 ,그것도 있고 제 성격도 있고, 조금씩 합쳐져 있다고 할까요. 제가 1남2녀를 두었는데 큰딸 결혼식만 조금 넓은 장소에서 축의금을 받지 않고 했고 나머지 두 아이의 혼사는 가족끼리만 치렀어요.
-홍효숙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중앙대에서 강의하실 때 강의안 복사를 영화제 사무실에서 하실 경우 A4 용지를 직접 사오셨다고 하던데요. =10매씩 학생 수대로 20, 30부를 복사하면 용지가 몇권이 없어지는데 그것은 사적인 용도니까, 공사를 좀 가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싶어서요.
좌파다 우파다 하는 것은 소모적 논쟁
-위원장님과 부산영화제가 부산 시민과 국민들의 기대를 받고 있지만, 해외 영화인들과 접촉하시다보면 또 다른 ‘우리’가 있음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 영화인들이 부산과 위원장님에게 갖는 기대가 있을 텐데요. =감독이나 프로듀서들이 다가와 DVD를 건네주거나 여러 가지 제휴 제안을 받으면 부산영화제에 걸린 기대의 크기를 느끼죠. 지난해, 지지난해에는 부산영화제 후반작업 지원을 받은 타이의 아딧야 아사랏 감독의 <원더풀 타운>이 세계 도처의 영화제에서 성공을 거뒀어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부산영화제 지원 자막이 뜨는 걸 보면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아시아 감독의 후원자 역을 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의 ‘포스트 김동호 위원장’시대를 논할 때 위원장님의 업적이 퍼스낼리티에 기인한 면도 많기 때문에 승계나 전수가 불가능한 부분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곤 합니다. 특히 한국사회에 중요한 인맥이라는 부분이 그러한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화제가 14년이 되었으니 그 부분의 필요성도 줄었고 현재 현실 정치세계나 재계나 젊은 세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미 흘러간 세대죠. 다만 염려가 되는 건 제 나름의 방법으로 인맥을 형성해온 해외 영화인들과의 관계인데 그 또한 새 사람이 새로운 방법을 갖고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해결된다고 봐요.
-정권이 바뀌고 나서 일부 영화인들이 부산국제영화제가 좌파세력이 지배하는 영화제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영화계 내부에서 좌파다 우파다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봐요. 그렇게 치면 모스크바나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등 구사회주의권 영화제가 다 좌파 영화제라고 봐야잖아요. 부산이 무슨 좌파 이념을 지닌 영화만 상영하는 영화제도 아니고. 다만 지금 오해받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요. 부산영화제가 관계된 아시아 문화 투자기술 펀드의 대표인 유인택씨가 <화려한 휴가>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좌파 영화가 아니냐. 고로 부산도 친좌파 영화제 아니냐고 몰아가고 있죠. 또, 영화제 초기에 자주 모습을 보인 배우 몇분이 노사모 소속이었고 노정권이 좌파 정권이니 부산도 좌파 영화제라는 논리가 있어요. 그리고 <씨네21>에서 기자로 일했던 분 셋이 부산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는데 <씨네21>이 좌파 잡지니까 부산영화제도 그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었죠. 말이 되지 않으니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좌파 논란 외에 또 하나는 영화진흥위원회를 김아무개가 주도해서 부산으로 이전시키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인데요. 영진위의 부산 이전 문제는 노정권 초기에 공공기관을 지방분산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결정된 거예요. 내가 그렇게 힘이 있었으면 총리를 했겠죠. 허허. 뭐,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덕분에 다른 도시로 갈 게 부산에 왔다면 말이 되긴 하죠. 그러니 부산영화제를 만든 제가 원흉이라고 몰아붙이면 하는 수 없고요.
-공직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신 만큼 위원장님은 공무원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의 강연 요청도 잦으실 텐데 어떤 이야기를 하십니까? =문화공보부 관료들은 주로 산하기관에 한번 나가서 임기 한 주기 혹은 두 주기 정도 하고 은퇴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제 경우는 완전히 다른 분야로 와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 경우라 저렇게 변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바라볼 수 있겠죠. 전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공무원으로서 현재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갖고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외국어 하나는 제대로 익혀두는 것이 좋다는 것. 제가 제일 후회를 느낀 부분이니까요.
짐 빨리 싸는 법, 장거리 여행의 비법
-사진과 현대미술 애호가이시기도 한데 직접 사진을 찍을 때 신경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감독과 배우 사진은 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 있어요. 예를 들어 칸영화제 폐막 파티 같으면 기자들이 들어갈 수 없잖아요? 그 안에서 전도연과 장만옥이 포옹하는 장면이라든가, 그런 광경을 찍은 사진들이 있죠.
-찍은 사진은 반드시 인화해서 챙겨두었다가 다음해 영화제나 다른 영화제 참석여부를 체크해 손수 건네주시는 걸로 압니다. =일일이 우편으로 부칠 시간 여유도 없으니, 뽑아서 잘 분류해두었다가 챙겨가는 것이죠. 이번 라스팔마스영화제처럼 5년 만에야 사진을 전달하게 되는 일도 있고요.
-1년의 반 이상을 출장으로 보내시니 비행과 여행에서도 달인이실 것 같습니다. 좋은 요령이 있나요? 비행기에서 잘 지내는 법, 짐 빨리 싸는 비결이 있나요? =워낙 숙달이 돼서 자동으로 몸에 익힌 매뉴얼이 있어요. 일단 속옷 다섯장을 챙기는데 도시를 옮겨 다니는 여정이라면 한 군데에 한장씩 추가해요. 이동할 경우 세탁할 시간이 하루 없어지니까요. 빨래비누를 항상 가방에 넣어 다닙니다. 1주일 여정이면 한개, 2주일짜리 출장이면 비누 두개를 가져가요. 새벽 4시 반이나 5시면 일어나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노트북 컴퓨터에 어제 일기를 입력합니다. 그러다보면 5시 반에서 여섯시 사이가 되고 달리러 나가죠. 돌아와서는 러닝, 팬티, 양말 세 가지를 빨아 널고 목욕한 뒤 아침을 먹으러 가면 7시 반에서 8시입니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는 잠을 잘 자는 편입니다. 일간지와 <씨네21>과 <필름2.0> 두권을 보고 나면 첫 기내식이 나옵니다. 먹고 바로 잠들었다가 마지막 기내식 직전 화장실이 한가할 때 일어나 면도를 하고 내릴 준비를 하죠.
-현재 시점에서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갖고 계신 두려움이나 염려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특별히 없지만, 부산국제영화제가 10년 뒤 어떤 모습일까, 기왕 시작했으니 잘돼야 하지 않을까 계속 눈을 못 뗄 느낌도 들어요. 한편으로는 일을 그만두고 나면 외국 가서 몇년 머물며 영화나 실컷 보고 돌아올까 싶기도 합니다.
-직접 영화를 한편쯤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도 간혹 피력하셨는데요. =허허. 실컷 보다보면 만들기도 하겠죠. 그런데 나도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영화를 보다보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요. 2004년쯤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마련해서 부산영화제 10주년을 앞두고 칸과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 가서 인터뷰를 딴 적도 있어요. 하긴 칸영화제에 온 사람들의 인터뷰로 영화를 만든 감독도 있더군요. 저도 영화에 관한 특정 주제를 잡고 공통된 질문을 허우샤오시엔, 기타노 다케시, 빔 벤더스 같은 감독에게 던져 코멘트를 받으면 어떨까 생각해보긴 했습니다.
-영화인들이 김동호 위원장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 한다면 허락할 용의가 있으십니까? =그건 내가 죽은 다음에, 허허. 전기를 내자는 출판사들도 더러 있었는데 아직 나는 영화인으로서 그만한 원로도 아니고 그럴 나이도 위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지만 특정 종교는 없어요. 온갖 제(諸) 잡신이 저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요. (미소)
追伸 2006년 1월 금주를 결심하기 전까지 김동호 위원장은 주선(酒仙)의 경지에 이른 주당이었다. 그와 술자리를 같이한 젊은이들이 도전의식을 불태울 지경이었다. 위원장의 화려한 음주 경력이 막바지에 다가가던 어느 해 해외영화제 술자리에서 영화기자들 여럿이 조를 짜 “오늘은 꼭 보내드리자”고 결의한 다음, 집중 공략해 그를 먼저 눕게 만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영화기자는 “마치 아버지를 이겨낸 것 같은 쾌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정작 내 마음에 들어박힌 것은 이 무용담의 에필로그다. “위원장님을 안아 옮기는데 여럿의 손이 필요없을 만큼 너무 가벼웠어요. 마음이 묘했어요.” 그를 바라보는 영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감히 애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기에 어느새 애틋함이 포함됐다고 느껴서다. 인터뷰를 약속한 오후 2시까지도 한국과 일본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결승전이 끝나지 않았다. 영화제 사무실에 들어서자, TV 앞에 젊은 직원들과 나란히 선 채로, 수신 상태가 나빠 흑백 노이즈가 윤곽만 희미하게 그리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선하게 웃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의 모습이 보였다. “언젠가 위원장님이 더이상 계시지 않는 사무실 풍경을 상상하면 눈물이 핑 돌 것 같다”라고 했던 한 스탭의 심정을 나는 어렴풋이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