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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굿바이, 마지막 서부사나이여

클린트 이스트우드적인 시스템의 완성 <그랜 토리노>가 환기하는 것

<그랜 토리노>를 보고 나서, 저 완고한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그저 찬미하는 일 외에는 이제 그의 영화에 관해 (적어도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무력감을 벗어나기 힘들다. 영화 속의 목사가 죽음에 관해 설교할 때 썼던 표현을 빌리면 ‘쓰고도 달콤한’ 무력감. 이스트우드의 영화 이력은 그 자체가 영화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이전에도 거의 없었지만 앞으로도 있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기적은 만신전의 배우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는 희귀한 사실을 훨씬 넘어선다(물론 이 점에서도 그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은, 무성영화 시대 이후로, 오슨 웰스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는 두 가지 분야의 성취를 각각 이룬 게 아니다. 예컨대 <대도적>(마이클 치미노 감독, 1974)의 도둑 선더볼트, 혹은 <사선에서>(볼프강 페터슨 감독, 1993)의 비밀요원 호리간을, 그가 직접 연출한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의 비행사 프랭크 혹은 <그랜 토리노>의 노인 코왈스키와, 심지어 <고독한 방랑자>(1982)의 컨트리 가수 레드와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때로는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연출작에서조차 그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아버지의 깃발>의 브래들리,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쿠리바야시, <미스틱 리버>의 데이브)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노쇠해가는 그 육체야말로 영화의 심장

그가 감독으로든 배우로든 영화에 참여하는 순간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된다. 이것은 그가 주연만 맡는 경우에도 연출에 개입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감독 돈 시겔과의 작업이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 이스트우드는 배우 겸 프로듀서로서 제작의 전 과정을 통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선 개입이나 영향력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를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인 1973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기를 사랑하며 계속 연기하고 싶다. 하지만 연출의 만족감이 영화 만들기의 어떤 분야보다 깊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렇지만 나는 연기나 연출보다 더 깊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 같다. 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측면을 사랑한다.”

감독이나 주연 혹은 제작의 크레딧에 관계없이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영화에 깊이 스며든다. 요컨대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인격적(예술가로서의 그리고 자연인으로서의) 등가물이다. 여전히 놀라운 사실 하나는 그것이 늘 전통적인 서사체 영화, 심지어 종종 대중적 장르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거의 불가사의한 조화가 있다. 우리가 고전기 이후 혹은 스튜디오 시스템의 몰락 이후로는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습관적으로 생각해왔던 대립항들, 즉 사적 표현과 장르적 소통, 개인적 스타일과 전통적 서사, 주류적인 것(혹은 할리우드 인사이더)과 독립적인 것(혹은 할리우드 아웃사이더),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심지어 보수적 남성성과 진보적 개방성이 어떤 이음매도 없이 한몸이 되어 있는(혹은 되어가는) 순간을, 그의 영화 혹은 그의 영화 만들기에서 목격한다. 아마도 <그랜 토리노>는 이 모든 것들의 가장 아름다운 합주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오늘의 영화 세상에서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해온 사람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외에는 없다. 이스트우드의 어떤 한 작품보다 미학적으로 더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영화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의 전 작품을 통해 영화적 기억과 인격적 기억을 함께 축적하고, 영화들이 그들 사이에서 대화를 벌이며 사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역사를 구축한 사례는 이스트우드의 경우를 제외하면 찾기 힘들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기억과 역사의 중심에 이스트우드의 육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결국 노쇠해가는 자신의 육체의 기록이며, 그 자신의 영화적 시간과 자연인으로서의 시간이 함께 새겨진 그 육체야말로 이스트우드 영화의 심장이다. 범상한 멜로드라마처럼 보이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스트우드의 이제 늙어버린 육체가 환기하는 우리의 공유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타고난 천재성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구축한 시스템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스트우드의 개인 영화사 멜파소 프로덕션은, 짐작과는 달리, 그가 감독으로 데뷔하기 4년 전인 1967년, 그러니까 그가 출연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케티 웨스턴들이 뒤늦게 미국에 개봉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스트우드가 단숨에 당대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오른 직후에 세워졌다.

이듬해 공개된 <집행자>를 시작으로 이후의 거의 모든 이스트우드 영화는, <사선에서>를 제외하면, 이 작은 영화사에서 이스트우드의 지휘 아래 태어났다. 그는 영화사의 규모를 키우지 않았고 적절한 수준의 제작비 유지에 철저했다(“600만달러가 든 영화가 있다면, 내 희망은 그것이 1천만달러 영화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필름코멘트>, 1984). <더티 하리>(1971) 때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워너브러더스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제작비를 지원받았지만, 작품 선택에서부터 영화 제작에 관한 모든 권한은 이스트우드가 행사했다. 때론 상업적 실패작도 있었고(예컨대 <미드나잇 가든>), 실망스런 작품도 없지 않았지만(예컨대 <핑크 캐딜락>) 결과적으로 이스트우드는 워너에 수익을 남겨주었다.

프로듀서로서의 크레딧에 관계없이 이스트우드의 재량권은 무제한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들>(1999)에 따르면, <무법자 조시 웰즈>(1976)를 만들 때 이스트우드는 감독 필립 카우프먼을 해고하고 직접 메가폰을 들었다(다행스럽게도 이 영화는 이스트우드의 손길 아래 <수색자>의 당당한 후예이며 <페일 라이더>에 버금가는 걸작 서부극으로 태어났다. 감독이 카우프먼이었다면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미국감독조합에서는 한 영화의 감독이 해고될 때 조합의 다른 감독이 그 영화를 맡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이스트우드룰’을 만들었다. <타이트로프>(1984)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 룰 때문에 감독 크레딧은 연출에서 사실상 손을 떼야 했던 시나리오작가 리처드 터글에게 주어졌다(이 영화의 실질적 감독이 이스트우드라는 사실은 리처드 시켈이 쓴 그의 전기에 의해 12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물론 공식적인 감독은 여전히 리처드 터글이다).

이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이스트우드의 천재성은 또한 멜파소 프로덕션이라는 시스템의 천재성이다. 이스트우드의 기적은 프로듀서로서의 이스트우드를 말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는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인 만큼 위대한 프로듀서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이미 말했듯이, 이스트우드는 아마도 세 영역을 합친 것보다 더 깊이 자신의 영화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멜파소의 시스템이다.

코왈스키를 통해 육화되는 영화의 기억

(이하 스포일러 있음) 나는 <그랜 토리노>가 이스트우드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만큼 멜파소 시스템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4, 5군데에 불과한 로케이션 위에 일상적 사건 위주로 전개되지만, 이스트우드의 영화로서는 놀라울 만큼 설명적인 대사들, 세대간 인종간 갈등과 전쟁의 흔적 그리고 종교적 질문을 아우르는 세련되고 농축된 이야기, 예기치 못한 그러나 감동적인 인간애가 담긴 결말, 무엇보다 유머와 비장미의 절묘한 배합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이스트우드에 무관심한 관객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다(실제로도 이스트우드의 영화로는 미국과 영국에서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스트우드의 영화와 함께 살아온 사람에게라면 <그랜 토리노>는 오랜 친구이자 불세출의 거인의 퇴장을 알리는, 그럼으로써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고별사와도 같은 영화다.

<그랜 토리노>는 이스트우드의 걸작들이 종종 그랬듯 자기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 코왈스키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의 기억을 육화한다.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들이 코왈스키에게로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모여들어 마치 그가 이스트우드적 인물들의 자축연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코왈스키는 한국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았고, 포드 자동차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지금은 은퇴한 지 오래되고 병들었고 지금 막 아내를 잃었으며, 가족과 불화하는 까탈스런 노인이다. 그가 훈장을 자랑하거나 동네 이발사와 거친 농담을 주고받을 때 <대도적> <승리의 전쟁> <스페이스 카우보이>의 유쾌한 주인공들을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먼저 불러오고, 경찰력이라는 제도도 종교도 믿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해 홀로 나서면서 <더티 하리> <무법자 조시 웰즈> <페일 라이더> <평원의 무법자> <용서받지 못한 자>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는 지금 이 작은 현대 도시에서 여전히 서부 사나이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10대 갱들이 소동을 피울 때 왜 경찰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신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기도했을 때 아무도 응답하지 않더군. 문제가 생기면 즉시 행동에 나서야지.”

뭔가 달라 보이는 점도 있다. 코왈스키가 결국 아시아계인 몽족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했을 때, <그랜 토리노>는 <체인질링>이 그랬듯이 이스트우드의 영화치고 너무 선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몇몇 평들은 코왈스키의 결단을 마초적 보수주의자인 이스트우드의 각성과 연관시켰다. 예컨대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를 “한 남자의 선한 본성의 개화에 관한 이야기이며, 다른 인종들이 서로에게 더욱 개방적이 되어가는 신세기 미국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오바마 시대를 의식한 듯한 이 설명은 <더티 하리>를 이 영화가 공개된 시점에 정점에 이른 성해방 및 자유민권 운동에 대한 우익 파시스트의 적개심의 표출이라고 본 폴린 카엘을 비롯한 당대 미국 비평가들의 비난을 연상시킨다. 당대의 정치상황에 영향을 받는 이런 지역 정치학적 해석은 창작자와 같은 지역에 속한 사람들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국외자로서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요소가 있다 해도 부차적일 뿐이다.

80살이 된 노인이 새삼스레 어떤 각성에 이르렀거나 성숙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이스트우드는 변한 게 아니다. 한 장면의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더티 하리>로부터 불과 5년이 지난 1976년에 만들어진 <무법자 조시 웰즈>에서 웰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북군의 약탈로 가족을 잃은 뒤 10년에 걸친 복수의 순례를 떠나 냉혹한 살인마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여정의 마지막에 두 인디언과 백인 모녀를 죽음의 위협에서 구한 뒤, 그들을 안식처로 데려다준다. 그러나 그곳도 곧 난폭한 코만치족의 위협 아래 놓이자, 조시 웰즈는 코만치의 악명 높은 추장 ‘10마리 곰’에게 홀로 찾아간다. 바로 이 장면. 웰즈는 “나는 정부가 아니라 사람을 믿는다. 내가 당신에게 삶을 주고, 당신이 나에게 삶을 준다. 내 말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라며 공존을 제안한다. ‘10마리 곰’은 “당신 말에는 철(iron)이 있다. 코만치의 말에도 철이 있다. 정부 문서에는 철이 없다. 우리 같은 전사들이 삶의 투쟁 아니 죽음의 투쟁에서 만난 건 좋은 일이다”라며 그 제안을 수락한다. 서부극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대화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장면은 <수색자>(1956)에서의 존 웨인과 인디언 추장 스카의 살기 어린 조우에 비하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만 33년 전의 조시 웰즈도 적어도 오늘의 코왈스키만큼 선의와 개방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느슨한 몽족 잔치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랜 토리노>에서 이스트우드의 변화는 굳이 찾자면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도입부인 아내의 장례식과 조문 파티 장면 다음에, 이웃의 집에서 벌어지는 몽족 잔치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가 갑자기 몽족 이웃의 집에 들어와 있는 이 장면은 좀 이상하다. 여기선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별다른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 몇 장면 뒤에 코왈스키가 그 집으로 초대받아 몽족의 낯선 풍습을 만나고 소년 타오의 평판도 다시 듣게 되므로, 이 장면은 서사의 전개를 위해선 거의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도입부가 코왈스키의 성향과 전력, 그가 주변 인물들과 맺은 관계를 탄복할 만큼 간결하고 경제적으로 전해주기 때문에 이 장면의 느슨함은 더 두드러진다.

나는 이 장면이 이스트우드가 그들에게 바치는 영화적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해될 만한 혹은 동정받을 만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길지 않은 장면에서나마 그들을 전적인 주체로 등장시키는 것. 이 초반 장면이 존재함으로써, 타오가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를 타고 해변로를 달리는 마지막 장면이 이 몽족 소년이 자비로운 백인의 물질적 은혜로 유사 백인이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장면으로 성립된다. 이 은밀한 카메라의 결단이 낯선 타자를 불쌍한 타자로 전환하는 서사 전략(예컨대 <슬럼독 밀리어네어>)보다 훨씬 윤리적이며 사려 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미세한 변화와 무관하게 <그랜 토리노>는 여전히 철저히 아니 더욱 이스트우드적이다. 젊은 신부가 “한국전쟁 때 당신은 잘못된 명령 때문에 살육의 죄를 지었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내뱉는다. “남자를 괴롭히는 건 명령 때문에 저지른 일이 아니야.”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 고해성사에서 다른 여자와의 키스, 소액의 세금 탈세, 아들과의 불화를 말하면서도 끝내 그 살육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남자는 회개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내 손은 이미 더럽혀졌으니까, 이 일을 마무리 짓는 것도 나 혼자라야 해.” 코왈스키/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무법자다. 38년 전 더러운 경찰로 등장해 경찰 배지를 강물에 던지고 나서, 퇴락한 무법자의 몰골로 종종 돌아온 그 사내는 이제 스크린 위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영화적 분신이 어떻게 종말을 맞아야 하는 지 알고 있다. 마지막 서부사나이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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