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이다. 배우 강혜정이 <허브> 이후 2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 영화 <킬미> 등 활동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난 2년간 그녀는 왠지 조용했다. 영화가 개봉을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허브>가 개봉한 2007년 무렵부터 강혜정은 조금씩 유해졌다. 도도하게 내뱉던 말이 줄었고 무거운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작품 외적인 소음에 휩싸였던 적도 있다. 치아교정 이후 달라진 인상에 사람들은 성형설을 얘기했고, 뒤이어선 당시 남자친구와의 결별설도 튀어나왔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새로운 작품 <우리집에 왜왔니>를 꺼냈다. 역할은 스토커이자 노숙자인, 하지만 아린 속사정을 품은 여자 이수강. 수수께끼 같은 면모는 <도마뱀>의 아리를 닮았고, 남의 집에 거침없이 쳐들어가는 행동은 <연애의 목적>의 홍의 당돌함을 연상케 한다. 다소 침잠됐던 시간을 정리하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든 느낌은 강혜정이 다시 팔딱거리는 자신의 본능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엔 아픔의 시간도 더했다. 그녀는 말했다. 미치도록 연기하고 싶다고. 이제 다시, 강혜정이다.
-언제 받은 시나리오인가. =<세탁소>란 시나리오로 시작했다. 그게 3년 전이었고 <우리집에 왜왔니>로 바뀐 게 1년 반 전이다. 황수아 감독과는 원래 알던 사이라 예전에 같이 영화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스무살 때였나? 그러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읽어보지 않겠냐고 물어왔고 좋다고 했다. 그게 <세탁소>였다. 구보즈카 요스케가 출연한 일본영화 <란도리>와 같은 원작이다. 너무 재밌었다. 그런데 투자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힘든 일과 부딪혔는지, 감독님이 투자를 받을 여지가 있을 만한 걸로 다시 써보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단 써보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집에 왜왔니>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좋았던 건가. =음…. 일단 하기로 했었으니까. (웃음) 약속의 개념이 컸다. 뻔한 캐릭터와 뻔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좀 다르고 생뚱맞아 보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노숙자를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잖나. 그것만으로도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예쁘게 보이는 게 너무 힘든데 이 영화에선 자연스럽게, 꾸미지 않고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수강이란 캐릭터를 어떻게 정리했나. =극단적인 경우라 생각했다. 다 누군가를 미치듯이 좋아할 수 있다. 상대는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 어쩌지 못해 마음대로 한다. 그러다 상대에게 귀찮음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게 괴롭힘이 된다. 이수강이란 친구는 그걸 시작은 했는데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는 아이다. 정말 지독히 혼자 지내다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데 통제가 안되는 거다. 근데 나는 그 이유를 수강이 상대(박지민, 승리)를 너무 사랑해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운명공동체? 평생 같이 있어야 하는 약속 같은 거랄까. 병희(박희순)를 만나면서는 관계에 있어 욕심을, 감정을 절제하는 걸 알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번 역할은 독특하지만 <도마뱀>부터 조금씩 역할이 유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 도발쪽이었는데 이제는 온화쪽이랄까. (웃음) =무슨 말하는지 알 것 같다. <도마뱀> 이전까진 본능에 충실했던 작품들이다. 물론 그 뒤에도 그렇긴 하지만 순수하게 이전과 똑같진 않다. 예전엔 현장에 가서 부딪히고 시나리오는 젖혀두고 캐릭터를 떠올리고 상상하며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 작품들은 좀 학습한 친구들이다. 접근방식도 달랐던 것 같고. 근데 지난해 <킬미>란 영화를 하면서 다시 부딪혔다. 왔다갔다하려나보다.
-조금은 착한, 편안한 캐릭터에 끌리게 된 것도 있나. =좀 심심해 보이는, 연기하기엔 진짜 힘들지만 세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이 나를 좀 덜 피곤하게 했다. <웰컴 투 동막골>은 밝고 무아지경 그 자체였다. 계속 <웰컴 투 동막골>만 찍었으면 좋겠다. (웃음) 역으로 <연애의 목적> 같은 걸 계속 찍었다면 나는 정말 어마어마한 고독에 시달렸을 거다. 그걸 반복하면 아마 스스로도 지친 시간이 됐을 것 같다. 근데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우리집에 왜왔니>도 봐야 하고, <킬미>도 봐야 한다. 착한 것 같지만 욕도 하고 별거 다 한다.
-지난해 여름 오락프로그램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에 출연했다. 그때 받은 인상은 도도했던 강혜정과 너무 달랐다. 어딘가 움츠러든 것 같았다. =버라이어티가 처음이었다. 또 언니들이랑 나왔으니까. 막내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또 내가 ENG 카메라 돌아가면 말을 잘 못한다. 굳는다. (웃음)
-단지 그거뿐이었나. 사실 치아교정 이후 성형설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소리에 많이 힘들었을 것 같고, 본인의 달라진 인상에 스스로 어떤 느낌이었을지 조금 걱정스러웠다.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좋다.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도 정리됐고. 초이스도 잘할 자신이 있다. 어릴 때부터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불편한 기억들을 금방 털어버리는 훈련을 해왔다.
-더 솔직히 말하면 <허브> 이후 강혜정이란 배우가 한톤 다운된 것 같았다. =음…. 나는 3월에 본 모의고사에서 성적이 좋아 연기 잘하는 사람이라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 기말고사 즈음 여러 사건들이 터지면서 성적을 말아먹었다. (웃음) 머리가 나빠진 애, 게이지(gauge)가 낮아진 애로 재평가받은 거다. 그리고 지금 2학년이 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다 안 왔다. 갈 길이 많다. 2~3년간 있었던 일들이 내 인생, 연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 시간은 아니라고 본다. 잠깐의 앓았던 시간? 그냥 그랬던 것 같다.
-<허브> 이후 대중이 보는 배우 강혜정의 인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기의 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강혜정의 연기 자체를 수용하길 꺼렸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말해주면 감사하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억울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연기만 잘하면 그만이지’라고 했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상처는 받는다. 누군가가 꼬챙이로 찔러대면 가서 죽이고도 싶다. 하지만 내가 대중의 관심, 인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 그냥 연기하는 게 너무 좋고, 연기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내가 힘들었던 건 나의 무엇이 바뀌었고, 공격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것에 내가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시시해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말쯤?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길이. 어차피 난 예뻐서, 육감적이고 섹시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어, 연기 좀 하나보다’로 관심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냥 계속 ‘여전히 연기 좀 하나보다’로 살면 되겠다 싶었다. 그냥 내 세계로 살면 되잖아 싶었다.
-다음 작품은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웨딩 팰리스>와 전계수 감독의 <러브픽션>인가. =예전에 타이영화(<보이지 않는 물결>)를 찍으면서 해외 작업하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한류 열풍, 할리우드 진출, 이런 건 말도 안되는 피곤한 말들이고 나랑은 관계도 없다. (웃음) 솔직히 시나리오로 따지면 내가 고를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외국에서의 작업이 재밌을 것 같아 한 거다. 근데 상상했던 것과 좀 달랐고, 지금은 촬영이 스톱된 상태다. <러브픽션>은 준비 중이고. 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진행되는 영화라 아주 재밌다.
-예전에 항상 했던 말이 ‘재밌기 때문에 연기한다’였다. 지금은 어떤가. =한동안은 연기를 미쳐서 하진 못했던 것 같다. 정말 제대로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었다. 그런 작품이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타들어갈 정도로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