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은 완벽했다. 유명한 철학교수인 조너선 댄시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BBC> 코스튬드라마 <대니얼 데론다>의 타이틀 롤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2005년에는 케이트 모스와 함께 버버리 광고를 찍었다. 2천년대 중반부터 영국 배우에게 뜨거운 구애의 눈길을 보내던 할리우드의 열광에 합류, <HBO> 드라마 <엘리자베스 I>에서 철없는 미남 에섹스 백작을 연기함으로써 2006년 에미상 남우조연상에 지명되었고, 배우 클레어 데인즈와의 열애 끝에 최근 약혼을 발표한 것까지, 휴 댄시의 궤적은 휴 그랜트와 올랜도 블룸의 그것을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양상을 띤다(똑같은 영국 배우라도 킬리언 머피라든가 제임스 맥어보이와는 좀 다르다). 사랑스러운 영국식 악센트와 지성적인 미모로만 승부한다…? 물론 휴 댄시는 그를 향한 호들갑에 그같은 ‘불순물’이 조금씩 끼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할리우드 진출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슬리핑 딕셔너리>라든가 <엘라 인챈티드> <원초적 본능2>는 쑥스러운 기억이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문제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엘리자베스 I>로 시작하여 톰 칼린의 문제작 <세비지 그레이스>에서 어머니와 아들을 동시에 유혹하는 미청년 샘, <이브닝>의 가슴 아픈 알코올중독자 청년 버디, <제인 오스틴 북클럽>의 청일점 그릭으로 이어지는 그의 출연작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자폐증을 앓는 청년이 위층 여인과 조심스런 로맨스를 쌓아가는 드라마 <애덤>(올해 선댄스영화제 최고 인기작 중 하나)에 이어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트렌디드라마 <쇼퍼홀릭>까지, 2009년의 출연작들은 휴 댄시가 메인 스트림 영화계로 도약하는 발판으로 점쳐지고 있다.
<쇼퍼홀릭>에서 휴 댄시가 연기한 루크 브랜든이라는 역할은 상당히 막중하다. 정신줄을 놓고 사는 쇼핑중독자 여주인공 레베카에 대응하여,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진중한 현실감을 균형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정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영화와 로맨스를 지상 위로 내려놓아야 하는 역할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라든가 <브링잉 업 베이비> 같은 고전 스크루볼코미디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쇼퍼홀릭>에서 순진한 이상주의자 청년을 연기한 게 꽤나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쇼윈도 속의 화려한 옷에만 정신팔려 있던 레베카가 처음으로 이 훈훈한 남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사랑을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음도 두근거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