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으로 들어간다. 물잔이 보이네. 플라스틱 흰빛 컵. 최악이다. 일전에 홀로 지방 소도시 어느 식당엘 들어갔지. 사람이라곤 홀서빙 아주머니와 수염이 안 예쁘게 자라난 40대 남성뿐. 누런 플라스틱 컵이 내 앞에 놓인다. 원래 하얀색이었을 컵이 포도즙이라도 담아두고 하루 동안 물들인 뒤 대충 헹구어낸 것 같은 상태가 됐다. 나는 비분강개하지 않고 말한다. “아주머니 컵이 왜 이래요?” 그녀는 별로 급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더니 힐끔 내려다보고는 “응, 우린 락스 안 써.” 두둥. 욱하며 나와버리고 마는 말, “다른 식당에선 다 그걸 쓴단 말이에요?” 이성을 잃으면 안된다. 이 아주머니 상당히 순진해 보였고 나한테 불쾌한 비보를 전해준 것 말고는 직접 피해를 주지는 않았으니 혼자서만 뾰족해졌다가 사그라진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를 작업할 때의 일이다. 감독과 PD를 만나는 자리였고 청담동에 있는 꽤나 럭셔리한 빵가게였다. 새하얀 수건을 왼팔에 걸치고 나와 널찍한 접시에 예쁘게 담긴 파스타를 놓고 가는군. 흡족한 비주얼이었어. 첫술을 뜨는 순간 수세미라 부르는 주방용클리너의 파편. 나는 뾰족해진 채 크리스토퍼 리브가 목에 설치한 기계에서 나는 소리처럼 괴이한 목소리로 “지배인 오라고 하세요” 단호하게 외친다. 절절매는 웨이터 뒷모습이 쓸쓸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살짝 측은지심. 그렇지만 먹을거리를 취급하는 곳에서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닌가. 결국 파스타 값은 치르지 않고 고급스러운 빵들이 가득 담긴 큰 비닐백을 들고 나온다. 연출부, 제작부와 맛나게 나누어 먹으며 푸드파이터의 전설적 사건들을 쏟아놓는다. 이때 빵을 함께 먹은 연출부들과 순댓국밥집에 갔을 때, 국밥을 먹다가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 강숙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끼리끼리 눈짓 등의 사인을 보내며 은닉하려다가 들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사와 장부기록을 하며 매일 먹는 식당에서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걸 봤다. 구석자리에 앉아 입맛도 없는 상태로 끓이다 말고 내온 된장찌개를 못마땅하게 먹고 있었지. 주방이 비스듬히 보이는 상태였는데 나의 앞 테이블을 치우던 아주머니, 세팅되어 있던 반찬을 주방 반찬통에 다시 탁탁 털어넣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입 안으로 반쯤 들어간 숟가락을 그대로 빼서 내려놓고는 얼른 사인을 하고 나온다. 바쁘니까 일단 나는 떠난다. 얌전히 나간다. 다시 여기에 오지 않겠다, 마음먹었지. 그러나 다음날 영화사 대표가 바로 그 식당에서의 회식을 제의한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걸음한 나는 반찬을 거의 섭취하지 않고 주방을 신경 쓴다. 어제 그 아주머니 여지없이 또 그러고 있네. ‘안돼, 숙, 참자’ 다짐하다가 부르르 떨고 일어나고 만다. 음식 내오는 구멍에 상체를 구겨넣고 말한다. “아줌마 그러지 마세요!” 얼굴이 빨개지며 “어머 우린 반찬 다시 안 써요”라고 말하는 아줌마에게 내 얼굴을 20cm 거리로 들이대며 “다음부터 안 그런다고 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하세요”. 슬그머니 몸을 빼고 심장에 미친 듯이 뜨거운 혈액이 공급되는 희열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나는 둥글고 긍정적인 사고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고 대외적으로 둥글다. 그런데 실은 그대들에게 들키지 않은 뾰족한 것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지 무디게 얼버무리며 사는 건 재미없다. 나는 식당에서 뾰족해지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이상한 희열을 느낀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웬만하면 홀로 식당에 있을 때만 뾰족해질 터. 숙과 식사하는 것을 피하지는 마시라. 크크.
강숙 콘티 작가. <그놈 목소리> <어깨너머의 연인> <맨발의 기봉이> <음란서생> <너는 내 운명> <어린 신부> <장화, 홍련> 등을 작업했다. 유쾌발랄한 그녀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kangsook.com으로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