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이 부조리한 기적을 어떻게 믿지? A :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대니 보일 감독은 여전히 몽상가거든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최다 8개 부문을 수상했다. 게다가 정말 ‘골고루’라는 표현에 걸맞게 원작이 있는 작품으로서 각색상, 인도풍 음악이 대부분인 사운드트랙으로 음악상과 주제가상, 그리고 100% 낯선 인도 로케이션으로 촬영됐음에도 촬영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올해 아카데미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단 하나의 작품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얼핏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생각될 법도 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그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이유는 뭘까.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둘러싼 이모저모와 더불어 이 영화를 바라보는 듀나와 남다은 평론가의 서로 다른 두개의 시선을 싣는다.
<텔레그라프>의 데이비드 그리튼이 ‘오바마 시대의 첫 번째 영화’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한 인도 빈민가 소년의 기적적인 판타지에 관한 영화다.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18살 고아 자말(데브 파텔)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최고 인기 퀴즈쇼에 참가한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그였지만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에 오르게 된다.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본 경찰은 자말을 사기죄로 체포한다. 하지만 경찰에게 증언하면서 지금껏 자말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답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음이 플래시백으로 차례차례 보여지고, 그가 퀴즈쇼에 출연한 진짜 목적도 서서히 드러난다. 그렇게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하나뿐인 형 살림(마두르 미탈)과 갖은 어려움을 다 겪고, 또한 처음부터 운명이라 믿었던 여자 라티카(프리다 핀토)를 향한 오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도가 배경인 현대판 <올리버 트위스트>
인도 태생의 비카스 스와루프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두달 만에 완성했다는 소설 <Q&A>는 믿기 힘든 행운에 관한 이야기이자, 위선과 거짓을 배제한 정직한 삶에 관한 동화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가난한 고아 청년이 지상 최대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서 우승한다. 모두가 그를 의심했지만 그 열두 문제는 모두 우연하게도 그의 삶과 관련된 문제였다. 책상 위에서 머리로 익힌 ‘지식’이 아니라 그의 몸에 깊게 새겨진 ‘체험’의 문제들이었다. 종교 싸움에 휘말려 어머니를 잃고, 형과 함께 타지마할에서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거대 조직의 보스가 된 라티카를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알게 된 해답들이었던 것.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기획자 테사 로스는 2005년 <Q&A>가 출간되자마자, 필름4의 북 스카우트 케이트 싱클레어의 권유로 접하게 됐다. 열두 문제에 얽힌 이야기를 재구성해나가면서 펼쳐지는 인도의 풍경과 현실이 꽤 복잡했지만, 이야기 자체가 지닌 메시지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는 곧장 <풀 몬티>(1997),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2008)의 시나리오를 쓴 사이먼 뷰포이에게 연락했다. 원작 소설을 읽고 ‘인도에서 펼쳐지는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라 생각한 그는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부조리한 사회계층 구조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이자,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자들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찰스 디킨스는 무엇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이먼 뷰포이는 바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퀴즈 프로그램 하나로 빈민과 부자 사이를 오가면서, 갖가지 인간 군상이 등장해 영화 전편을 풍성하게 메우는 현대판 찰스 디킨스 이야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Q&A>라는 밋밋한 제목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제목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도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마자 사이먼 뷰포이를 비롯한 제작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감독은 바로 대니 보일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던 대니 보일은 그가 전혀 손대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시나리오임을 알아채고는 단숨에 제의를 수락했다. 이 이야기가 인도를 배경으로 한 현대판 <올리버 트위스트> 스토리가 될 것이란 제작진의 의도도 거기에 한몫했다. 영화지 <시네아스트>의 로버트 콜러도 “찰스 디킨스가 주요한 배경으로 다뤘던 영국 산업혁명 초창기의 느낌과 확산되는 글로벌리즘의 새로운 영토로서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인도가 꽤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대니 보일은 처음에는 퀴즈쇼가 중심에 놓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구심이 들었지만, 상당한 분량으로 출연하는 아이들의 맑고 순진한 품성에 매료됐다. 그들은 대니 보일의 2004년 작품 <밀리언즈>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다. <밀리언즈>의 두 꼬마 안소니와 데미안은 어느 날 100만파운드가 담긴 가방 하나를 발견하고 마음껏 돈을 쓰기로 결심하지만(유로화 통합 전 열흘 동안), 그것이 사실은 은행강도가 훔친 돈가방임이 드러나면서 골치 아픈 소동을 겪게 된다. 특히 천사표 동생 데미안은 돈가방을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라 믿고서,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나눠주는 착한 아이였다. 영화 속 자말의 어린 시절 모습이 딱 그렇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밀리언즈>의 형 안소니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형 살림도 권력 지향적인 속물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배낭여행자처럼 촬영했던 추격신
대니 보일은 오직 영화 때문에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고 변형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도 외의 로케이션 장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뭄바이 빈민가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은 오직 인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전쟁 때 인도에 오신 적이 있고, 제게 많은 인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는 게 대니 보일 감독의 사전 정보였다. 하지만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컬처 쇼크’를 받았다. 엄청난 인파와 소음, 그리고 뭄바이라는 도시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당한 것. 환경 자체가 지금껏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어려움은 인도의 로컬 프로덕션 회사인 테이크원(Take One)의 도움으로 거의 하루 종일 교통마비 상태인 인도에서 무사히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인도에서 가장 큰 슬럼가인 다하라비, 그리고 뭄바이에서 서쪽에 위치한 가장 활기 넘치는 장소인 공항 근처의 주후 등지에서 촬영했다. 슬럼가에 최대한 방해가 가지 않게 최근 레드원 카메라와 함께 한창 주목받는 경량 디지털카메라 SL-2K를 사용했다. 이미 대니 보일과는 <28일후…>(2002) 등의 작품에서 디지털 작업을 함께했던 앤서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이기에 호흡은 문제없었다. 주인공 소년들이 슬럼가를 질주하는 추격신의 경우 앤서니 도드 맨틀이 한손으로 카메라를 들고서도 슬럼가 구석구석을 담아냈다. “촬영감독이 아니라 거의 배낭여행자 수준”이었다는 게 감독의 얘기다.
캐스팅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최대한 슬럼 지역 실제 주민들을 캐스팅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영어 대사로 진행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인도를 비롯 영국과 미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7살, 13살, 18살을 연기할 세 그룹의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기 시작했는데 연령대별로 일단 외모나 분위기가 비슷해야 하는데다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학교 이상의 나이라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스탭 중 한명의 제안으로 어린 자말은 그대로 힌두어를 사용하게 하고 그 이후부터 영어로 이어가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이들은 실제 슬럼가에서 캐스팅됐으며 촬영 기간 동안 짧은 영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착한 눈’을 가진 18살 자말 캐스팅은 순전히 대니 보일의 딸의 아이디어였다. 영국 인기 TV시리즈 <스킨스>의 광팬인 딸이 데브 파텔을 추천한 것이다. 그렇게 <스킨스>의 말썽쟁이 모슬렘 소년 ‘앤워’는 그와 정반대의 청년 자말로 태어나게 됐다.
주인공 자말 캐스팅은 감독 딸의 아이디어
얼핏 돈이라는 요소로 인해, 정체불명의 돈가방을 둘러싼 이야기인 대니 보일의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1994)나 마약으로 번 돈다발이 등장하는 <트레인스포팅>(1996), 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가방 이야기 <밀리언즈>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그러고 보면 대니 보일 영화에서 ‘돈’은 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사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가장 가까운 느낌의 그의 이전작을 고르라면 단연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 이하 ‘<인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꽤 큰 정서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자말처럼 <인질>의 로버트(이완 맥그리거) 역시 한심한 가난뱅이 청소부이고, 끊임없이 곤경에 빠지게 하는 현실과 싸우며 미국 전역으로 도주하는 커플의 로맨스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무엇보다 두 영화 모두 완전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거기에는 원작을 자기 식대로 만들고자 하는 대니 보일의 의지가 숨어 있다. 그가 영화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전에 만든 <28일후…>(2002)를 딱히 스스로 좀비영화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듯,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다른 많은 발리우드영화를 봤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라 생각하고 만들지는 않았다”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니 보일이 생각한 실마리는 무엇일까. 대니 보일은 <인질>에서 두 남녀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허락했듯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을 지켜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등장시킨다. 이는 희랍고전극의 극작술 중 하나로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극의 긴박한 국면을 일시에 타개하고 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갑자기 나타난 신’ 정도 될 텐데 극중에서 기계장치로 작동하는 구름 따위를 타고 느닷없이 내려오기 일쑤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종종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런 해결’을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로맨스 모험 소설들이 애용하는 장치인 것만 분명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보여주는 기적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인질>로 돌아가자면, 로버트는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 운명을 믿어야 하지?”라는 질문에 “왜냐하면 난 몽상가니까”라고 답한다. 그렇다. 대니 보일도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바로 그렇게 답할 것이다. 난 여전히 몽상가야.
똥 뒤집어쓰게 한 그 배우는…
아미타브 밧찬과 아요디아 등 영화 속 실제 이야기
아미타브 밧찬은 어린 자말이 똥을 뒤집어쓴 몸으로 다가가 사인을 받을 정도로 사랑하는 배우다. 1942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델리대학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해 무수히 많은 영화들에 출연했으며 한때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가 2000년부터 인도에서 방송될 때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영화에서도 그 인기가 확인되듯 발리우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그의 아들 아비셰크 밧찬 또한 영화배우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정작 아미타브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너무 인도의 음지만을 보여줬다며 불쾌감을 표했다고.
인도는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과 그 속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도들의 갈등의 역사가 깊다. 특히 원작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성장기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말하는 아요디아는 1992년 두 종교집단의 극단적 유혈 충돌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바브리 이슬람 사원이 힌두교 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고 믿는 힌두교도들이 그 사원을 파괴하고 난장판으로 만들며, 전국적으로 힌두와 이슬람의 충돌이 번지면서 수천명이 목숨을 잃게 된 것. 영화에도 등장하듯 이런 폭동을 힌두 경찰들이 묵인했다는 소문도 공공연하다. 자말 가족은 이슬람교도로 나오며 어머니는 그 폭동의 한가운데서 숨을 거두고 만다.
영화 속 퀴즈 중 하나는 ‘역사상 가장 먼저 100점을 기록한 크리켓 선수’에 관한 것이다. 인도에서 크리켓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다. 세계 최강은 호주라 할 수 있으며, 자말은 예시들 중에서 호주의 대표적 크리켓 스타 리키 폰팅, 그리고 천문학적인 수입을 자랑하는 인도 최고의 크리켓 스타 서친 텐두카 사이에서 고민하다 정답 ‘잭 홉스’를 맞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