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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연기가 법이다
홍성남(평론가) 2009-03-19

은퇴작일지도 모르는 <그랜 토리노>서 작가적 성취 이루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월트는 몽족 소녀 수를 괴롭히는 흑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너네들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봤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바로 나야.” <그랜 토리노>에서 이것이 꽤 인상적인 대사인 것은 <더티 하리>(1971)에서의 하리가 했던 짧지만 그 유명한 대사 “덤벼봐”(Make my day!)와 공명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하리 캘러한이 은퇴한 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느껴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금 더 들여다보면 월트라는 존재에게서는 하리 이상의 어떤 자취가 묻어나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점이다. 예컨대 침을 뱉듯 피를 토하는 것이나 총을 겨누는 자세 등에서 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들에서 그가 보여줬던 면모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랜 토리노>는 <사선에서>(1993)의 대사에서처럼 ‘살아 있는 전설’로서의 이스트우드와 대면하게 해주는 영화라고 볼만 하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 주인공 월트는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관습적인 ‘액션 영웅’은 아니라는 점에서) ‘전설’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나는 인물이다. 그를 연기하는 이스트우드의 연기도 당연히 이전의 그의 방식과 겹치면서도 미묘한 어긋남도 함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랜 토리노>는 ‘영화배우’ 이스트우드의 세계를 되돌아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영화가 된다.

“그는 배우가 아니다”라는 악평

<그랜 토리노>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배우로서 그만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을 한 이스트우드와 만난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것이 그 역사가 오래된 이스트우드의 ‘얼굴’임은, 그의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다 알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 출세작인 <황야의 무법자>(1964)와 그 후속 영화들을 보고 열광하면서 자라난 아이들은 인상을 가득 쓴 표정을 짓는 것을 배웠다고. 여기에 추가할 것이 있는데, 그건 그 아이들이 남들과 대면해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는 것이다.

<더티 하리> 촬영현장에서 돈 시겔 감독과 함께.

이렇게 그에게 매혹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줬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스트우드가 그들에게 특히 남성적으로 전능한 액션 영웅으로서 소망 충족의 환상적인 실현을 이루게 해줬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가 참 따라 하기 쉬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일종의 과소평가를 내포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미 <황야의 무법자> 시절에서부터, 그리고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평자들은 이스트우드의 연기, 혹은 비(非)연기, 또는 연기방식에 대해 의심이 가득 섞인 진술들을 해왔다. 예컨대 <더티 하리>(의 파시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던 폴린 케일은 <이것이 법이다>(1973)에 대해 쓰면서 이스트우드의 연기를 악평했다. “그는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서투른 배우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의 연기가 형편없다고 우리가 평가하기 전에 그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빈센트 캔비 같은 영화평론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스트우드가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고 썼다. “이스트우드는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안에서 프레임에 포착될 뿐이다…. 그는 세상에 출몰하는 완벽한 육체를 가진 유령이다.”

‘메소드 액팅’에 반(反)하는 침묵

물론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해 이스트우드가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은 영화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연기는 고함치고 울부짖으며 땅 위를 구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평자들이 흔히 ‘연기’라는 것과 동일시했던 당대의 어떤 ‘방식’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반감 같은 것을 감지해낼 수 있다. 그는 50년대에 20대를 보냈지만 말론 브랜도나 몽고메리 클리프트 같은 당대의 스타들이 대표했던 연기 방식(‘메소드 액팅’)에 심취해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메소드 액팅을 구사했던 배우들의 ‘뜨거움’과 대비해 종종 이스트우드 표정의 ‘쿨함’이 거론되곤 하는데, 이스트우드에 대한 전기에서 리처드 시켈은 흥미롭게도 모던 재즈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열광과 그로부터 배운, 관객을 굳이 자기쪽으로 애써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무심함의 태도에도 그 원인을 찾아갈 수 있다고 썼다). 애초부터 그는 감정을 쥐어짜내려는 식의 무언가 ‘노력’이 들어가 있는 연기는 훌륭한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스크린 위에 존재하고 ‘행위’하는 스타와 이른바 ‘연기’라고 하는 것을 하는 스타를 구분한 영화학자 제임스 내리모어의 익숙한 논의에 따르면 이스트우드는 전자에 속하는 배우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내면에 깊숙이 자리하는 감정을 공들여 꺼내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감흥을 주고 그들을 매료시키는 배우인 것이다.

그와 같은 연기관과 육체적 자질을 가진 배우가 이스트우드에게서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들어내려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이스트우드의 육체적 외양과 이스트우드의 존재 자체를 본 세르지오 레오네와 만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포스트모던한 유희성을 가진 레오네의 웨스턴 영화들에서 이스트우드가 앤서니 만의 심리 웨스턴들에서와 같은 분열적인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미세한 제스처로 정보를 전달하려 하는 이스트우드의 존재 방식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즉 아무런 정체성을 알려주지 않아서 두텁고 상황을 마음대로 통제하기에 초월적인 히어로와 아주 잘 어울렸다.

미니멀리즘 연기의 걸작 <페일 라이더>

다시 한번 리처드 시켈의 전기를 인용하자면, 그는 이스트우드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의 첫 연기 선생이었던 이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국면은 이런 것이었다고 썼다. 배우가 자신의 연기 파트너와 관객에게 아우라를 발하는 것, 자신이 가진 자질을 거의 신비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스트우드 연기의 ‘미니멀리즘’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 목표한 바 최상의 것이 성취된 영화로는 <페일 라이더>(1985)가 꼽힌다고 말하고 싶다. <셰인>(조지 스티븐스, 1953)의 어두운 이스트우드 버전인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금광업자의 위협에 시달리는 한 작은 마을에 당도한다. 어쩌면 그는 도움을 구하는 소녀의 기도에 응답해 마을에 온 구원자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저 ‘목사’(Preacher)라고 불릴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조금이라도 과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모두 거부하면서 표정과 제스처에서 최소한의 것만 남겨둔다. 그의 얼굴에서 분노와 평온의 표시는 아주 미세하게만 쓰여 있다. 혹은 그와 동류였던지도, 혹은 그와 과거의 어떤 일을 공유했을지도 모를 악한에게만 그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아무도 읽지 못할 듯한 ‘목사’의 얼굴을 보고 악한은 말한다. “자기에게 합류하라고 우리를 초대하는군요.” 한편으로 여기에서 이스트우드 캐릭터는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어디에선가 갑자기 상대편을 공격하는, 즉 가시적인 이동을 최소화하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뿐더러 폭력을 행할 때에도 간결한 동작으로 적을 처치한다. 이 모든 ‘억제’가 ‘목사’를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존재로 만들어주면서 영화에 <황야의 무법자> 때와는 또 다른 두꺼운 공기를 부여해준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그는 실체를 가진 존재였던가 아니면 유령과 같은 존재였던가. <페일 라이더>에 오묘한 공기를 가져다준 이스트우드의 절제하는 주인공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할리우드영화, 예컨대 <람보2>(1985) 같은 영화에서 말은 않으려 하고 감정은 감추려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외적 지향을 참지 못하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액션 히어로로서의 지위와 비교해볼 만하다.

확고한 이미지가 흥행에 방해되기도

물론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가 항상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속의 이름없는 사나이의 위치에 계속 머물러 있었거나 혹은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더 나아가거나 한 것만은 아니다. 이스트우드에 대해 우리가 가진 선입견에서 벗어난 그를 보여주는 영화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으로는 돈 시겔이 감독한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는 남북전쟁 중 남부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당한 북군 병사 존 맥버니를 연기한다. 심하게 다친 그는 다행히 부근을 지나던 한 소녀의 도움을 받아 그 아이가 기거하는 학교로 옮겨진다. 그러나 여자들만 사는 그 학교는 차차 맥버니에게 안식처만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 스스로도 성적 욕망을 품었겠지만 또한 그로 인해 학교의 여자들 여럿이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욕망을 표면 위로 드러내고 그들 사이에 무자비한 질투의 파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랜 토리노> 촬영현장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촬영감독 톰 스턴, 촬영스탭 스티브 캄파넬리(왼쪽부터).

이 영화에서 우리는 이스트우드와는 잘 연관될 것 같지 않은 이스트우드 캐릭터를 보게 된다. 그가 연기한 맥버니는, 영화 속 대사를 빌리면 학교의 여자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가 아직 처녀인 여교사를 자기 곁으로 오게 하는 데 대단한 설득의 기술을 발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그는 이때뿐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또 다른 목적으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는 인물로 나온다. 이스트우드 자신은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것에 대해 이것이 바로 자신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주인공이 질투심으로 가득한 여자들에게 다리를 잘리는 것을 관객이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영화 속 상황을 이스트우드라는 배우의 존재와 결부시키면 관객으로서는 마치 이스트우드 캐릭터가 자신의 이미지를 ‘배신’했기에 받은 처벌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그가 맥버니를 연기했기에 맥버니라는 남자주인공은 단지 단죄받아 마땅한 난봉꾼만이 아니라 동정심도 품을 수 있는 인물로도 그려지면서 영화 속 남녀 인물 사이의 대립이란 상황은 어느 쪽에만 손을 들어줄 수 없거나 어느 쪽만 비난할 수 없는 모호함의 공기를 띠게 된다. 자기만의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한 스타의 위치는 그렇게 텍스트 속으로도 침투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다.

액션 스타에서 연기하는 스타로…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에는, 자신이 의식했는지 여부는 알지 없지만, 여하튼 이렇게 배우가 아니라는 것(non-actor)에 대한 반박과도 같은 몇편의 영화가 눈에 띈다. 그 흥미로운 또 다른 예가 바로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 1990)이다. 앞에서 거론한 <페일 라이더>의 예를 들자면, 여기에는 ‘목사’와 금광회사의 사장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더티 하리>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어쩌면 전형적인 이스트우드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사장은 감정을 폭발하는 반면 말없는 주인공은 냉정을 잃지 않는다. <추악한 사냥꾼>이 흥미로운 것은, 이스트우드 영화에서라면 익숙할 수도 있는 <페일 라이더>의 상황이 반전된다는 점이다. <추악한 사냥꾼>에서 감정을 폭발하는 쪽은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영화감독 존 윌슨이고 조용히 바라보는 쪽은 그 주위의 인물이다. 게다가 자신의 직업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윌슨은 대단한 과시주의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부터 이스트우드가 액션 스타로부터 연기하는(acting) 스타로 그 영역을 넓히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추악한 사냥꾼>에서 이스트우드가 그간의 자신의 이미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은 것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설명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간략하게만 말하자면, 그 영화는 이스트우드의 영화 궤적에서 중요한 주제인 남성 영웅에 대한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프로젝트다). 이스트우드는 특히 <추악한 사냥꾼> 이후로 사람들이 흔히 ‘훌륭한 연기’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볼프강 페터슨이 감독한 <사선에서>(1993)는 그 실례에 속하는 영화이다. 분명히 이것은 이스트우드 자신이 연출을 맡은 영화가 아님에도 이스트우드가 지금까지 구축해놓은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영화다. 다시 말해 <사선에서>의 호리건은 <더티 하리>류의 주인공의 늙은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인물에다가 이스트우드는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불어넣는다. 그는 액션 영웅이긴 하되 늙어서 이제는 뛸 때에는 숨을 헐떡이기도 하고 로맨스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스트우드는 호리건이라는 인물에게 인간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사선에서>에서 이스트우드의 연기가 단지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실체를 갖춰간다는 것은, 그의 상대역인 존 말코비치와 융화된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연극 무대 출신이고 다소 메소드 지향의 배우인 존 말코비치는 영화 내내 냉정을 잃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호리건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던 것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오면 말코비치가 연기하는 악당은 감정의 격발을 일으킨다. 그가 변장에 능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는 지금껏 ‘가장’을 해왔던 인물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스트우드의 연기 자체, 그리고 그가 구현한 인물의 진실함은 돋보이게 된다. 물론 이같은 결과는 내러티브의 짜임새, 이스트우드와 말코비치 각각의 연기 능력과 조화 모두에 빚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사선에서>에 대한 리뷰에서 한 평자는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배우라고 했다. 이건 처음에 듣는 것과는 달리 그저 나쁜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동’을 보여준다고는 해도 결국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는 배우라는 말이다. <사선에서>에서도 그랬고, 최근작 <그랜 토리노>에서도 그랬다. 일단 그가 위치하는 세계가 그의 영화들을 봐온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곳이다. 여전히 그는 자식들과 불화를 일으키면서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려 하고, 아내가 떠난 것에 상심해 하며, 다른 인종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주위의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과 잘 어울린다. 이스트우드는 그같은 자신의 세계 속에 던져졌지만 그래서 여전히 자신처럼 행동하지만 또 조금은 다르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찌푸린 표정은 일종의 캐리커처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지만 다른 영화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꾸부정하고 불안한 걸음걸이는 또 한편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자기 세계에서 자기 존재를 살아낸다. 그는 감독으로서만이 아니라 배우로서도 ‘작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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