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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여신들의 그래픽 노블
장영엽 2009-03-12

<샌드맨> 닐 게이먼 지음/ 시공사 펴냄

우스꽝스러운 코스튬 등장 빈도 지수 ★ 여성 독자의 만족도 UP 기대 지수 ★★★★★

“기억나요, 내 코스튬? 그 바보 같은 짧은 치마에 배꼽까지 늘어진 목걸이라니… 우리가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한 장면, 2대 실크 스펙터인 로리 저스페직은 지나간 옛 시절을 이렇게 추억한다. 그건 어쩌면 DC코믹스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을 입고 고뇌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영웅들이라니. 그 세계의 서사는 이미 충분히 원대하고 성숙했으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좀더 참신하고 격조 높은 새 시대의 콘텐츠가 필요했다.

스토리작가 닐 게이먼(<스타더스트> <신들의 전쟁>의 저자)의 <샌드맨>은 DC코믹스 제2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DC의 성인용 레이블인 버티고의 대표적인 타이틀 롤이 된 이 작품은 코스튬 히어로 대신 고대 그리스의 여신들을, 장문의 고백체 대사 대신 셰익스피어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더러운 현대의 거리 대신 몽환적인 꿈의 왕국을 등장시킨다. 히어로의 가부장적 이미지를 상징했던 DC의 선 굵은 만화는 좀더 어둡고 서정적인 그림체로 거듭났다.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한 유일한 그래픽 노블이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권 안에 든 몇 안되는 그래픽 노블이란 수식어로 <샌드맨>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대중적 인기를 겨냥할 뿐만 아니라,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 많은 수작이다.

최근 총 11권으로 구성된 <샌드맨> 시리즈 중 4권이 국내에 정식 번역·출간됐다. <서곡과 야상곡> <인형의 집> <꿈의 땅> <안개의 계절>이 그들이다. 오컬트 집단의 주술에 걸려 70년 동안 유리 상자 안에 갇혔다가 탈출한 ‘꿈의 왕’ 모르페우스(샌드맨)가 쇠락한 왕국을 재건하고 잃어버린 보물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중심 이야기다. 특히 <샌드맨>의 핵심 주제와 등장인물이 소개되는 1권 <서곡과 야상곡>, 환상문학상을 받은 <한여름밤의 꿈> 에피소드가 수록된 3권 <꿈의 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악몽과 지옥, 고통과 죽음을 얘기하는 1권은 단테의 <신곡>과 비견할 만하며,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재치있게 각색한 3권은 세기의 천재에 대한 격조있는 도발이다. 무리한 비유라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