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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인민의 초상’ 넘어선 ‘인민의 응시’

영화에 평등이 깃드는 진짜 마술 같이 아름다운 순간을 창조해낸 <24시티>

1958년에 세워져 50여년을 이어져왔으나 지금은 허물어지는 군수공장 팩토리 420의 마지막 시간. 그러나 그것을 허물고 들어설 현대식 주거지 24시티가 아직 완전하게 들어서기 이전의 시간. 그 흔한 말처럼 과거의 것이 사라졌지만 아직 새것은 오지 않은 불확정적인 이행의 시간. 지아장커의 <24시티>는 강제로 생겨난 그 이행의 시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댄다.

이 영화 <24시티>에 관해서는 허문영이 <씨네21> 689호 전영객잔을 통해 이미 한 차례 썼다. 그가 해낸 풍요로운 서술 이상으로 내가 이 영화에 더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그가 말한 이 영화의 위대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일종의 첨언을 해보는 것이다. 그게 이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모호함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태도일 거라 짐작하며 <24시티>는 그런 식의 대화가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걸 실로 요구하는 영화인 것 같다.

안과 밖으로 이어지는 상호작용

그러니까 이상하다. 이 영화는 단순하고 간결한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정제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결정된 것들로서의 사람과 풍경을 마지막으로 채집한 것처럼 보인다. 정지된 스틸로 마지막을 기억하고, 떠나가는 마음을 아련하게 추억하는 것 같다. 기억으로 우리를 정박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건 그 아련함과 쓸쓸함과 함께 있는 무엇이다. 이 영화는 어딘가 시종일관 운동하고 있다.

어느 한점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서로 오가는 정감의 힘이 <24시티>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오해가 될 것인가. 아니 차라리 어느 한편에서 멈추지 않고 서로 왕래하는 오고감의 운동성 자체가 이 영화의 운명이라면 지나친 생각일까. 즉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그쪽에서 또 반대쪽으로 던지고 받는 어떤 상호작용이 이 영화에는 있다. 어느 한점이 아니라 바로 그 왕래. 시적인 정취로서의 왕래. 문턱 또는 문지방 그 사이에 놓여 겹겹이 일어나는 상호작용. <24시티>가 단순하거나 정제된 것처럼 보이는 건 오히려 이 몇 가지 양방향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완벽한 결과에 가깝다. 이것이 결국은 지아장커가 마침내 이 영화를 중국 인민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지아장커가 <스틸 라이프>와 <>에서부터 수정을 시도했던 지점은 바로 여기이며 <무용>의 3부에서 찬란하게 도달했던 지점도 이것이었다. 그것을 풀어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 <24시티>다.

<24시티>가 얼마나 양방향에서 들고 나는지 알아차릴 만한 대표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허문영이 지적한 아름다운 장면. 음악이 흐르고 있고 경비원은 폐허가 된 공장을 마지막으로 시찰한다. 그때 갑자기 창문을 깨고 들어온 돌이 그 순간 흐르던 음악을 중지시킨다. 내재적 화면과 외재적 사운드 사이에 경이로운 영향 관계가 형성된다. 노래가 꿈꾸는 미래지향적 이상을 지금 무너져가는 돌멩이의 파편이 멈춰 세운다. 이것은 지아장커가 텍스트 내적인 장면을 통해 그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화면의 사건이 외화면의 사운드를 중지시켰을 때 일어나는 그 아득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아장커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명백하게 이 영화가 지금 무언가 안과 밖으로 이어지는 들숨과 날숨으로 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지아장커는 그런 작용 관계의 면모를 놓치지 않고 이 영화를 보기를 원하고 있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돌출시키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한편은 다큐이고 또 한편은 극영화인 <>과 <스틸 라이프>에서 같은 제스처가 반복해서 등장할 때(<>에서 리우샤오동의 자리와 <스틸 라이프>에서 한산밍의 자리) 그건 이 두 영화를 보는 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해석하고 선택할 여지를 주는 상호작용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걸 지아장커는 <무용>에서 1부와 2부에 이어 3부의 에피소드에서 첨예하게 수렴해냈다. 그건 물론 다큐와 픽션의 양방향에서 온다.

다큐와 픽션. <24시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양방향의 상호작용이 그것이다. 다큐와 픽션의 결합이라는 점.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지아장커 스스로가 잘 설명해왔고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라도 알게 된다. 때문에 나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다큐와 픽션이 결합된 형태에 관해 중언부언하기보다 오히려 지아장커만이 아니라 그를 포함한 아시아영화 안에 이런 양식이 있음을 간단하게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다큐-픽션의 결합은 지아장커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에게도, 리티판에게도, 류우에게도, 라브 디아즈에게도 있는 것이고 실로 오래되었다. 특히나 기억, 그러니까 구축의 행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재조립이 불가능한 기억을 다루려고 할 때, 이걸 다루는 아시아영화들은 어딘가 공통적인 가상선을 설정해낸다. 그러나 <24시티>에서의 특별함이라면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며 지금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라지는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지아장커가 <24시티>에서 하는 일은 전문적인 배우와 인민을 한자리에 놓는다는 점이다.

알려진 것처럼 <24시티>에는 루리핑, 진건빈, 조앤 챈, 자오타오가 등장하여 인민의 한 사람인 척 구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아장커는 그들이 중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배우라고 말한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만약 장미희가 이 영화의 조앤 챈처럼 어떤 영화에 출연하여 시민의 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지나간 70년대를 회고하고 또 당시에 자기의 우상이 장미희였다며 회상에 젖은 다음 <겨울여자>의 장면이 흘러나온다면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될 것인가. 혹은 그것이 장미희가 아닌 당대의 유명한 어떤 다른 배우라도 정서적 파장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배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져 있는 배우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진짜 인민과 섞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더군다나 지아장커는 비전문 배우를 연기시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연출자가 아니다.

그러니 <24시티>에서 보통 사람인 것처럼 등장하여 구술연기를 펼치는 그들을 배우라고 부르기보다는 유명 배우 즉 스타라고 인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지아장커가 필요했던 것은 무명이지만 충분히 인민의 한 사람으로서 등장하여 감쪽같이 구술해낼 수 있는 누군가의 능력이 아니라 한눈에도 그가 유명 배우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한 스타의 출연이자 출현이라는 양상이다. 이때 경계의 선긋기와 구별이 중요해진다. 즉, 이 사람은 스타입니다, 허구입니다. 지아장커는 경계를 무화한 다음 하나가 어느 하나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돌출시켜 조화보다는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방점을 찍는다. 실은 그 이유는 지금 그 경계를 넘어 무언가 오고 가고 있음을 끊임없이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스타가 발휘하는 보편성의 장

여기서 보편성과 개별성의 장이 어떻게 설정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지아장커가 인민들 사이에 스타를 기용하는 것은 그 말의 설득력을 애초부터 펼칠 수 없는 개별 인민을 대체할 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들이 출연함과 동시에 스타가 발휘하고 포섭하는 보편성의 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과 같이 출연하는 실제 인민들의 구술조차 그 스타들의 구술이 지닌 보편적 장을 뚫고 개별적으로 승화하지 않는다. 이건 스타의 말을 보편적으로 만들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스타의 말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말처럼 보편적으로 들릴 때 그렇다면 그 상대편에서 개별적이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이때 지아장커가 사람들을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멈춰 세운 장면을 지속적으로 삽입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오히려 그 초상일 것이다.

스타의 말이 들숨이라면 인민의 이름없는 초상은 날숨이다. 일단 이 영화는 자기의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개별 인민을 대신하여 등장한 스타의 보편적 말(구술)에 귀기울일 것인가, 혹은 침묵하는 개별적 인민의 초상을 볼 것인가의 양분된 문제로만 귀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말없이 초상을 볼 수 있는가, 초상없이 말을 들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우선 껴안게 된다. 나는 우선 말이 초상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아장커에게 이 영화에서 말과 초상은 서로 작용하는 것으로서 동등하게 중요하다. 말이 없이 초상만 더 중요해지지는 않으며 말이 있어야 초상이 중요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지아장커가 무엇을 의도했건 스타의 보편적 말과 인민의 개별적 초상이 경계를 드러낸 이후에는, (지아장커가 어느 것을 더 원했건 간에) <24시티>에서 결국 초상의 힘이 말의 힘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더 강력하게 부상한다.

문제는 더 분화되며 더 구체적으로 미세하게 상호작용한다. 나는 <24시티>를 보며 지아장커가 유도한 것처럼 인민의 초상을, 인민의 얼굴을 본다고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미세한 경계의 설정이 있으며 또한 그걸 넘어서는 작용이 있다. 초상을 그 이상의 무엇으로 이어내는 장면을 마주치지 못했다면 나는 이 영화가 위대하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이 영화가 강력한 상호작용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타의 보편적 구술의 장을 넘어서 무심하게 서 있는 인민들을 보았을 때 그것은 다만 그들의 초상이며 얼굴인가. 그들은 대상이며 우리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인가. 시선의 주관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으며 그들은 단지 대상으로 남는 것인가. 영화 속 한 장면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다.

두 남자는 장난을 치다 웃음을 참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아 철거되는 기자재 틈바구니에서 마지막 노동을 하는 두 노동자. 선후배로 보이는 이 두 남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런데 서로 어깨를 걸치던 그들 중 선배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의 목에 살짝 손을 대고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을 건다. 또 다른 남자는 웃으려다 참는다. 그러기를 두번 반복한다. 그들은 이 카메라에 담길 때 감독과 한 가지 약속을 했을 것이다. 이 카메라를 보세요. 그냥 잠시만 보고 계시면 됩니다. 그들에게 웃으라거나 연기하라고 지아장커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한 남자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웃음을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결극 그들은 대상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을 자의적으로 어긴 셈이 된다. 그러니까 한 남자가 장난을 걸고 나머지 한 사람이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는 것은 지아장커가 연기를 주문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고다.

물론이다. 지아장커의 당초 의도는 다른 이들처럼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아 철거되는 기자재 속에서도 마지막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두 사람의 초상을 묵묵히 기억하려는 것이다. 이때 미세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지아장커는 이 장면을 멈춰 세운 다음 다시 찍거나 빼버리거나 다른 장면으로 대체해도 됐었겠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 지아장커가 마침내 자신이 인민의 초상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응시를 찍는다는 사실을 감지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초상이 아니라 응시다. 우리가 보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보내오는 반사적인 시선이다. 그 응시란 그들이 규칙을 깨고 돌발적인 상황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양방향의 상호작용이며, 다른 무표정들에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 두 노동자가 돌출행동을 하여 이것이 지금 사이의 경계를 오고가는 행위임을 일깨워줌으로써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는 사실. 그 두 노동자가 은연중에 카메라의 명령을 따르거나 기억에 봉합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일어난 돌발적 사건. 그걸 받아들이는 지아장커의 유연함이 놀랍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인민의 몸이, 인민의 개별적 몸이 미세한 사건을 통해서 마침내 자율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그 양방향의 순간을 지아장커는 놓치지 않았다.

<24시티>에 이르러서도 지아장커가 그토록 바라는 대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정말 그걸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끝내 대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서로 오고가는 경계의 문턱을 만들어냄으로써 서로 공정한 양방향적이고 상호작용적 시선의 상태가 형성됨을 입증하는 것 같다. 경계를 넘어 오고가는 시선의 양방향. 때문에 이 두 노동자의 유쾌하고 불가사의한 장면은 지아장커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 속한다.

영화에 평등함의 마술을 부리다

다큐와 픽션이라는 두 양식, 그 안에서 보기의 서로 다른 위치를 유도하는 스타와 인민,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초상, 그리고 마침내는 무표정의 초상을 넘어 무언가 반응하고 손짓하는 초상에서 표정으로 그리고 표정에서 응시로의 전환.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그 두 노동자의 장면은 마침내 <24시티>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평등한 장면이 되며 동시에 <24시티>는 위대한 영화가 된다.

돌이켜보면 지아장커는 데뷔작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어떤 상호적인 응시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왔다. 인민이 영화를 응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그는 깨닫고 있었다. <소무>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매치가가 길거리 전봇대에 아무렇게나 묶여 있을 때 카메라는 갑자기 몸을 돌려 묶여 있는 그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들은 동원된 엑스트라가 아니라 영화를 찍는 걸 구경하던 사람들이다. 과연 그때 그들은 소매치기 <소무>를 본 것일까. 그들은 전봇대에 묶여 있는 소매치기를 본 것이 아니라 그걸 찍는 영화를 본 것이다. 동시에 그때 그들의 시선은 영화를 찍는 것을 보는 단순한 구경꾼의 시선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응하는 인민의 응시로 전환된다. <24시티>는 문득 이것이 지아장커의 중요한 영화적 의무 중 하나였음을 환기시킨다.

<24시티>는 진정으로 양방향의 영화란, 그리고 공평한 영화란 어떻게 완성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바로 팩토리 420이 무너지고 24시티가 들어서는 사연을 듣고도 우리가 무언가 희망을 걸게 하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흔히들 말하는 인터랙티브한 영화. 그것이 관람자의 선택에 따라 없는 숏을 삽입하고 신을 설정해 넣는 것으로 온전히 가능할 것인가. 그건 영화를 게임화하는 위험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응시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숏이나 신을 새롭게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내밀하고 영화적인 양방향의 방법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자면 문턱을 넘어서 오고가는 양방향의 영화, 상호작용의 영화. 그리고 그것이 더군다나 민초의 시선이라면. <24시티>는 더 많은 질문을 포괄하지만 영화에 평등함이 깃드는 진짜 마술 같은 순간을 창조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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