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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뮤지컬로 쓴 영화의 역사

<사랑은 비를 타고> Singin’in the Rain, 진 켈리·스탠리 도넌, 1952

영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 뒤 가장 주목받은 장르가 뮤지컬이다. 스크린은 노래하고 춤추며 단숨에 관객을 흥분시켰다. MGM이 1929년 <브로드웨이 멜로디>로 100% 토키를 성공시키자 할리우드는 너나없이 뮤지컬 제작경쟁에 뛰어든다. MGM은 뮤지컬의 메카가 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겠다는 사람들은 하나둘 이곳으로 몰려왔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르자, 뮤지컬도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성숙한 태도를 갖는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기만 했는데, 이제야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순간을 맞았다. 바로 <사랑은 비를 타고>(1952)가 발표된 것이다.

세 주인공의 삼각관계는 일종의 맥거핀

<사랑은 비를 타고>는 진 켈리와 스탠리 도넌의 공동연출작이다. 두 사람은 3년 전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에서 공동연출을 한 적이 있다. 켈리는 뮤지컬계 최고의 댄싱 스타였고, 도넌은 25살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이들이 다시 힘을 합해 내놓은 것이 뮤지컬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사랑을 비를 타고>다.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너무 지나치게 알려지는 바람에 사실 영화의 많은 장점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신나는 노래와 화려한 춤장면에 정신을 잃어, 주요한 이야기틀을 기억하지 못하는 관객도 많을 듯하다.

영화는 스타 커플인 도날드(진 켈리>와 리나(진 헤이건),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든 신출내기 배우지망생 캐시(데비 레이놀즈), 이들 세명의 삼각관계가 큰 축을 이룬다. 그런데 이런 사랑 이야기는 관객의 관심을 붙들어매기 위한 일종의 맥거핀이다. 영화가 진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영화를, 좀더 좁게는 뮤지컬을 이야기한다.

첫 장면은 도날드와 리나가 주연한 야심작인 영화 속의 영화 <왕실의 불한당들>(Royal Rascals)의 시사회로 시작된다. 스타시스템의 허구, 팬덤(fandom)의 광기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알고 보니 두 스타는 유명세를 유지하게 위해 커플인 척 위장한 사이였고, 형편없던 과거도 일류 교육을 받은 것으로 속였다. 의도적으로 스캔들을 만들고, 경력을 속이는 연예계의 속성이 오래된 관습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얼마 뒤, 두 스타의 시대물 <결투하는 기사>(Duelling Cavalier)가 제작된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뉴스가 전달된다. 최초의 토킹 필름인 <재즈 싱어>(1927)가 대히트 중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혁명 중이다. 신문 1면은 “스튜디오, 토키로 개종하다”, “뮤지컬, 전국을 휩쓸다” 같은 제목으로 덮여 있다. 제작팀도 급히 <결투하는 기사>를 뮤지컬로 바꾸기로 한다. 목소리 녹음이 시작되고 시행착오가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여배우 리나의 목소리다. 갈라지고 어린애 같은 발음을 관객이 듣는다면 그녀의 스타덤은 단숨에 무너질 것이고, 영화도 망할 것 같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립싱크’다. 리나가 노래하고 대사하는 부분은 전부 캐시가 대신하기로 한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도날드는 바로 그날 캐시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부른다.

사운드 도입기의 좌충우돌 담아

영화의 압권은 후반부에 15분간 삽입되는 현대물 제작 관련 상상장면이다. 뮤지컬을 더욱 생동감있게 만들기 위해 도날드는 현대물을 삽입하기로 한다. 이 상상장면은 댄싱 스타 진 켈리의 성공기에 다름 아니다. 시골에서 춤 하나만 믿고 브로드웨이로 온 청년이 사랑도 얻고 경력도 쌓는 이야기다. 사랑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여배우가 시드 채리스다. 단 5분 나오는데 아마도 <사랑은 비를 타고>의 최고의 숨 막히는 순간일 것이다. 긴 다리를 이용한 관능적인 춤은 영화 속의 진 켈리는 물론이고 관객의 넋도 빼놓을 정도였다. 그녀는 키가 너무 커 늘 무릎을 굽히거나 진 켈리보다 뒤쪽에 서서 춤을 췄다. 영화 속 여배우들의 파트너는 돈 많은 노인들이거나 리나처럼 가짜 연인이었는데, 시드 채리스의 파트너는 돈 많은 갱스터다. 그는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1932)에 나오는 주인공과 심복이 동시에 기억나게, 얼굴에 흉터(Scarface)를 갖고 있고, 늘 동전을 튕긴다. 이렇듯 영화에는 할리우드의 실제 사실들과 허구 속의 사실들이 혼재돼 있다.

영화 속 영화는 제목도 <춤추는 기사>(Dancing Cavalier)로 바뀌고 대히트의 조짐을 보인다. 시사회 때, 누가 정말로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했는지도 밝혀지고, 도날드와 캐시는 관객 앞에서 행복한 사랑을 확인한다. 보통의 경우는 여기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사랑은 비를 타고>에선 한 장면 더 있다. 바로 마지막에서 두 연인이 <사랑은 비를 타고>의 광고판 앞에 서 있는 순간이다. 주연배우 이름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본 모든 것이 바로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긴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 가운데 <사랑은 비를 타고> 속에는 사운드 도입기의 혼란과 뮤지컬의 발달 같은 영화의 역사까지 오롯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엔 진 켈리의 영원한 라이벌인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뮤지컬 <밴드 왜건>(The Band Wagon, 1953)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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