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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샐리 호킨스

샐리 호킨스를 보면 늘 머릿속으로 그 사람에게 하녀 유니폼을 입히게 됩니다. 이 사람의 연기를 제가 처음 본 게 <티핑 더 벨벳> 미니시리즈부터인데, 그 뒤로 연달아 본 샐리 호킨스의 작품들에서 이 사람은 연속적으로 하녀 역만 맡았단 말이에요. <티핑 더 벨벳> <영 비지터스> <핑거스미스>.

그렇다고 제가 호킨스를 (<8명의 여인들>의 에마뉘엘 베아르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 하녀의 궁극적 이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호킨스가 연기한 세 하녀는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 없었습니다. <영 비지터스>에서는 어린 소녀가 상상하는 하녀의 과장된 스테레오타입이었지요. <티핑 더 벨벳>에서는 잘 훈련되었지만 반항심을 죽이지 못한 섹스 노예였고요. <핑거스미스>에서는 부유한 상속녀의 재산을 노리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범죄자였고요. 생각해보면 이들 중 영국 계급사회의 평범한 하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특히 <티핑 더 벨벳>과 <핑거스미스>에서 호킨스의 캐릭터들은 늘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가 그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사회적 기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안주하는 사람들보다 더 살아 있는 것 같죠.

그러던 사람이 계급의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사정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베라 드레이크>와 미니시리즈 <설득>에서 샐리 호킨스를 보았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물론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전 당연히 샐리 호킨스라면 하녀 유니폼을 입고 빅토리아조 저택 어딘가에서 주인아씨와 화끈한 섹스를 하고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상류사회로 승진(?)하자 이 사람으로부터 뭔가가 확 빠져나갔습니다. 거의 비슷한 패턴의 연기를 하고 있는데도 느낌이 전혀 달랐죠. 하녀 역할을 했을 때, 호킨스의 다듬어지지 않고 투박한 동작과 표정은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의지와 개성의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행동을 하녀를 부리는 상류사회 아가씨 역할을 하면서 하니까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됩니다. 시스템의 꼭대기에 있으면서 결코 그 위치에 적응하지 못해 신경질적이 되는 딱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죠. 성적으로 자유롭고 언제 건 저택에서 뛰쳐나가 자기만의 삶을 살 것 같던 호킨스의 하녀들과 달리 호킨스의 상류사회 아가씨들은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도 호사스러운 새가 아니라 종종 굶고 구박당하는 초라한 새.

이러니까 호킨스가 마치 사극에만 나온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대극을 연기할 때도 늘 이런 전형성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니고요. (레베카 웨스트나 메리 셸리와 같은 캐릭터들을 어디다 넣어야 합니까?) 이번에 개봉된 <해피 고 럭키>에서도 샐리 호킨스는 21세기 런던을 사는 현대 여성을 연기했지요. 그럼에도 전 여전히 호킨스의 캐릭터를 어느 틀에 넣고 보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고약한 습관이지요. 물론 호킨스가 연기한 포피는 그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아요. 하녀도 아니고 마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전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호킨스의 포피가 행복에 겨워 약 먹은 사람처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것은 지금까지 그 사람의 연기와 캐릭터를 통제하고 관리하던 계급의 장벽이 깨어져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제한 속에 익숙해져 있던 다리가 더욱 가벼웠고 그 때문에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궁극의 에피파니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제 말을 다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모두 다 이미지 게임이니까요. 하지만 영화배우에서 이미지를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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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임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