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잘 알려진 고전들을 볼 방법은 많다. 영상기관의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다소 까다로운 방법부터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을 방문하는 간단한 방법까지. 그러나 극장에서 기억 속의 명화들을 다시 볼 기회는 흔치 않다. 더구나 부산의 가을 바다를 구경하면서 볼 기회는 더더욱.
11월7일부터 27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해운대 요트경기장 내)에서 열리는 ‘오래된 극장’ 영화제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꾸며졌다. DVD나 비디오 대여점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14편의 상영작들은 제작연도도 다양하다. 1934년에 나온 작품부터 1993년 작품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폭넓게 선택된 고전들이 관객 누구에게나 오래된 극장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선정 기준이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컬러와 흑백을 아우르는 과거의 명작들을 극장의 좌석에서 다시 보게 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카사블랑카>에서 <피아노>까지
‘고전’하면 생각나는 것은 단연 흑백영화다. ‘오래된 극장’은 1930년대와 40년대의 할리우드를 풍미한 흑백유성영화를 마련해놓았다. 당대의 아리따운 여배우들과 훤칠한 남자 배우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전성기를 앞둔 클라크 게이블과 클로데트 콜베르의 화학작용이 빚어내는 멋진 스크루볼코미디다. <카사블랑카> 역시 아름다운 연인 잉그리드 버그만 대신 희생을 택하는 험프리 보가트의 비장한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는 선전영화다. 여배우의 17살 꽃다운 시절이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고스란히 담긴 <오즈의 마법사>는 두말할 것 없이 주디 갈런드를 위한 뮤지컬이다. 존 포드 감독이 한 탄광가족의 몰락을 차분히 그려낸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월터 피전과 모린 오하라의 열연이 영화를 더욱 빛낸다.
컬러영화가 흑백영화의 뒤를 잇는다. 60년대와 70년대 할리우드의 작품은 알록달록해진 화면을 통해서 좀더 성숙해진 시선을 보여준다. <천국의 나날들>은 한적한 전원의 풍경을 바탕으로 비윤리적인 인간과 순수한 소녀가 만드는 찰나의 사랑을 그렸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캐릭터를 통해 정신이상자에 대한 사회의 억압은 정당한가를 질문한다. 한편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로맨스를 통해 할리우드 특유의 서정성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감미로운 멜로디를 들려준다. 오드리 헵번이 <문 리버>를 부르고 1962년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한 영화다.
느낌으로 다소 막연하게나마 구분해보자면 할리우드는 발랄함과 촉촉함이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날카로움과 건조함이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프랑스영화와 이탈리아영화를 보면 그렇다. 르네 클레망의 <금지된 장난>과 줄리앙 뒤비비에의 <나의 청춘 마리안느>, 또 네오리얼리즘으로 유명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은 각각 좋은 예를 보여준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무덤에서 십자가를 뽑아올리는 소년(<금지된 장난>), 유령에게 동화처럼 사랑에 빠지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소년(<나의 청춘 마리안느>), 광대에게 소녀를 빼앗긴 서커스의 거인(<길>). 예리한 현실에 상처받는 이들의 뒷모습은 씁쓸하고 건조하다.
눈여겨볼 영화가 몇편 있다. 고전 중의 고전만 상영한다는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 중 <피아노>(1993)가 제작연도순으로는 가장 늦게 나왔다. 90년대 뉴질랜드 여성감독의 작품으로, 쾌청한 풍광과 피아노 연주가 인상적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작품은 어떨까.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미국의 뒷골목에서 살아온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일생을 다룬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서정이 묘하게 겹친 이 작품은 1984년 한국 개봉 당시 절반이 검열 과정에서 가위질 당했으나 이번 영화제에서는 229분 완전판으로 상영된다.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도 주목하자.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열혈남아>는 시네마테크 부산 부설 ‘부산아시아필름아카이브’에 소장된 필름으로, 이번에 처음 외부에 공개된다. <우연한 방문객>은 ‘11월 수요시네클럽’의 행사로 편성되어 이윤기 감독과 함께 관람하고 대화의 시간도 갖는다. 옛 영화를 좀더 깊이있게 볼 특별한 기회다. 궁금한 점은 전화(051-742-4377) 또는 홈페이지(cinema.piff.org)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