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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차라리 더 에로한 모던보이가 좋다

에로, 그로테스크, 난센스의 관점에서 본 <모던보이>

이 영화는 좀 애처롭다. ‘애처롭다니? 당치도 않다!’라는 반박, 물론 예상된다. 제작비 80억원에 1930년대의 경성을 되살린 세트는 휘황하고 모던보이는 호사를 누리며… 이 영화의 세트, 음악, 의상, 안무는 사실 탈산업, 탈근대의 시기, 근대를 향수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크게 빠짐이 없다. 특히 음악이 인상적인데 이재진 음악감독은 1930년대 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한다. 소월의 시를 정미조가 노래한 <개여울>을 조난실(김혜수)이 일본 여가수를 위해 립싱크하는 부분은 창의적이고 흥미롭다. 당시 모던걸,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미쯔비시백화점, 와사등이 켜진 거리의 전차, 명동, 종로, 숭례문 그리고 경성역이 되살아난 풍경을 보는 일은 눈 사치에 가깝게 즐겁다. 감독 정지우는 세련되고 절제있게 그 과거를 세트화한다.

아, 그렇다면 이렇게 만사쾌조인데 예의 애처로움은 그 무엇이란 말인가? 난 이 영화의 방향성이 보여주는 의중, 의도를 존중하는 편이다. 친일, 반일 양분을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처음 이해명(박해일)의 과장된 스타일의 연기가 의아했다. 감독과 배우 두 사람 모두 뉘앙스있는 연기를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웨이브 파마를 하고 수십벌의 양복을 갖춘 조선 경성 재벌의 아들인데다 동경 유학을 한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인 모던보이 이해명을 꼭 박해일이 연기해야 하는 이유를 난 영화의 저 끝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전승국 제국일본을 황국신민들이 모여 축하하는 자리 총독부와 황국군인, 신민 무리들이 어울려 앉아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숭앙, 경배의 예를 갖추는 중이다. 철없던 모던보이 이해명은 독립군 조난실의 남편 역, 테러 박 역할을 한답시고 방탄복이 아닌 폭탄복을 입은 채 고위층 자리로 다가간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도 하듯 그는 황국신민류의 인간들이 눈을 감고 묵념을 올리는 사이, VIP석으로 다가간다. 이상의 원래 이름 김해경과 딱히 동떨어지지 않은 이름과 직업을 갖고 있는 이해명을 연기자 박해일이 해석하고 제시하는 방식은 이 장면에 와 적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섬세하나 둥글하기도 하고 여성적이나 두루뭉술하지 않은 호리호리한 몸매, 하얀 피부의 박해일은 이 장면에 정말 어울린다. 그는 배가 하얗고 나머지가 깜장색인 펭귄 무리들과 달리 배가 깜장색이고 나머지가 하얀색인 마이너 변종 펭귄처럼 조심스럽게 뒤뚱거리듯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자폭을 시도하는데, 물론 실패하고 실수로 겨우 태극기 하나를 나부끼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터져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실소, 난센스는 이 영화 전체를 되돌리게 하는 가역 장치다. 다소 의아스럽던 영화 초반부터 시작된 박해일의 과장된 연기방식은 여기에 와서야 그 답을 얻는다.

식민지 조선을 거꾸로 바라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선과 총후가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지배하던 시대적 정황과 거꾸로 가는 것으로 이 영화는 자신의 톤을 설정한다. 식민지의 강압과 훈육과 처벌이나 가난과 강탈 대신 이 영화는 ‘모던’의 매혹과 휘황함, 한눈에 반하는 사랑 그리고 낭만 등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문화연구에서 조망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나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경성기담> <황금광시대>가 보여주는 소비와 향유와 투기, 연애담을 다루어낸다. 이지민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취했다. <모던보이>가 공들인 부분은 물론 세트장이다. 명동성당을 비롯한 당시의 경성 시가지도 그렇지만 이해명이 조난실을 찾아가는 삼양목장의 설정은 엉뚱하다. 핵심은 크림색 양복을 입은 이해명이 말들의 분뇨 속에 뒹굴고 양복은 더럽혀지고 뭐 이런 것인데, 붉은색과 검은색이 잘 어우러진 앤티크 차를 타고 이해명이 이 삼양목장으로 들어올 때의 느낌은 그로테스크하다. 가축들은 원 소스가 분명하지 않은 조명, 빛에 반쯤 노출된 채로 나타나고 그 풍광에 이해명이 도착하는 모습은 개화기, 서양인이 묘사하는 조선의 모습처럼 문명과 반문명의 대립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명도 조선인이라는 것이다.

좌파 페미니스트 문화사가인 미국의 미리엄 실버버그(Miriam Silverberg)는 만주사변이 터진 1931년부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던 시기까지를 다루는 자신의 책 제목을 <에로 그로 넌센스>라고 명명한다. 한국에서도 당시 식민지 조선을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주제로 다룬 책이 나왔다(저자 소래섭).

영화 <모던보이>를 관통하는 토픽들도 바로 ‘에로’, ‘그로’, ‘난센스’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로테스크와 난센스는 전쟁 동원령 시기 일본의 근대 소비문화의 팽창 현상만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 근대성, 거부해야 하나 거부할 수 없는 소비, 스펙터클의 문화, 당시 전 인구의 1%도 누리기 어려웠던 그 도시 문화를 가리키는 데 적합하다. 그로와 난센스에 대해서는 위에서 제시한 바 있으니 이제 에로 부분에 대해 말해보자. 에로의 핵심은 김혜수가 맡고 있는 조난실이다. 나는 이 영화가 흥행적으로 ‘망한’ 이유를 진단하면서 김혜수의 역할을 질타하는 논조들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존중할 만한 커리어를 가진 여배우를 다만 20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꼴통 마초나 할 일이다.

약간은 부족한 팜므파탈 김혜수

김혜수는 사실은 독립군이지만 팜므파탈로 남자들을 유혹해 독립자금 및 거사를 도모하는 다중 캐릭터다. 일단 고위층이 드나드는 카바레에선 댄서 로라로 등장하고, 예의 립싱크 대역에서는 가수로 그리고 양복점의 재봉사로 등장한다. 또 상해를 주름잡는 테러 박의 아내이기도 하다. 아니, 그렇게 알려져 있다. 조선 독립운동을 지하에서 행하는 역할이니 뭐 이중 역할은 기본이겠지만, 그녀가 펼쳐야 하는 버라이어티쇼는 좀 과잉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12세 이상 관람가이기 때문에 김혜수가 수행하는 역할이 에로틱의 절정으로 가기는 구조적으로 힘들다. 과잉이 초과잉이 되어야 영화가 사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여배우는 성의를 다해 위의 역할들을 오가기는 하지만, 어떤 정점에 오르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녀가 이 영화에서 해내는 연기가 문제인 이유는 남들의 지적처럼 더이상 20대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때로 너무 소녀처럼 자신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검은 눈으로 순진하게 이해명을 올려다보는 조난실의 모습은 오히려 청춘스타 김혜수의 자기 보존 능력을 더 보여주는 편이다. 그러나 의상이나 노래, 공연은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다.

이제 애처로움의 문제는 이것이다. 1930년대 말. 시대는 수상하고 그로테스크하면 난센스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정조와 풍광을 알지 못할 열기에 감싸여 건너게 하고 좌초시켰던 에로티시즘은 이 영화에서 흉내로만 드러난다. 팜므파탈 조난실이 마지막 편지나 이해명과의 마지막 조우에서 신파극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독립군으로 자폭하는 것도 전반부 카바레의 열기마저 빼앗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에로, 그로, 난센스 중 그로와 난센스만 어중간히 남아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영화가 안타깝다. 복원된 경성의 시가를 유적하게 다니는 전차가 만들어내는 도시의 밤풍경이 이후 다른 작품의 영감으로 떠오르면 좋겠다. 예의 삼양목장의 어리둥절한 가축처럼 나도 어리둥절한 채 극장을 나온다. <사랑니>에서 절묘한 사랑의 심리묘사를 해낸 정지우 감독이 <모던보이>에서 이룬 세트, 음악, 그로, 난센스의 조합은 신빙성이 있으나 12세 이상 관람가의 에로티시즘은 매혹적이지 않다. 세트장에 매몰된 정신은 이 영화만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이즘 대작들이 보여주는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다. 예리한 칼처럼 시대의 심장부를 에로, 그로, 난센스로 도려낼 작품을 보고 싶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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