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허문영 선배가 <씨네21> 편집장으로 마지막 마감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편집장을 그만두겠다면 마지막 선물로 미래를 대비할 계책이 든 비단주머니 3개는 남기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반진반 투정을 부렸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이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던 중 제갈공명이 자신의 병이 위중해진 것을 알고 자신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어 비단주머니에 넣어 측근에게 줬다는 얘기를 떠올린 것이다. 귀신처럼 앞일을 내다본 제갈공명의 지혜를 칭송하는 옛날이야기일 텐데 어쩐지 편집장을 그만두는 사람도 제갈공명 같은 혜안을 전수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의 청이 정히 그렇다면 기획 아이템이 없을 때는 빨간 주머니를 풀어보고, 기사 첫 문장이 안 풀릴 땐 파란 주머니를 풀어보고, 기자 일을 아예 그만두고 싶을 때는 노란 주머니를 풀어봐라.” 뭐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그런 건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섭섭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현실은 무협지랑 달라서 지혜와 경험이 그런 식으로 전수되는 일은 없더라는 거다. 막상 편집장으로 마지막 마감을 하는 지금 사정이 그렇다. 비단주머니는커녕 지난 4년간 어설픈 편집장이랑 일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동료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저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한다.
“마감날이 있는 인생은 빨리 흘러간다”고 미국의 어느 저널리스트가 말했다는데 정말 그런 거 같다. 주간지 마감을 하다보면 신년호 만들고 창간기념호 낸 게 엊그제 같은데 연말 특집을 준비하는 일이 반복된다. 덕분에 시간을 알차게 쓴 것도 같고 시간에 쫓겨 생각없이 산 것 같기도 하다. 당분간 마감날이 없는 휴식을 갖게 됐는데 인생이 느리게 흘러가는 걸 보고 싶다. 느리게 걷다보면 빨리 달릴 때 볼 수 없던 것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이 지면의 마지막을 개인적 감상으로 채우자니 낯뜨겁지만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이 생각난다. 전교생이 6명인 시골 분교에 잘생긴 소년이 전학오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이 관객의 마음에 상쾌한 산들바람을 선사했던 영화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을 보면 주인공 소년 소녀가 입맞추리라 예상했던 순간 소녀가 칠판에 입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소녀가 사랑한 것이 특정한 소년이 아니라 오줌싸개 여동생을 포함한 아이들이며 시골 분교의 추억과 공기이며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임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씨네21>도 내게 그러했으며 독자 가운데도 그런 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턱없이 부족한 능력으로 이 자리를 지켰던 것도 고향에 머무르고픈 어리석은 마음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나의 비단주머니에서 꺼내 보일 수 있던 건 그게 다였다.
다음주부터 <한겨레> 매거진팀장이었던 고경태 기자가 편집장을 맡게 된다. <한겨레21> 편집장을 거쳐 <한겨레> ESC 섹션을 만들었고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을 통해 가슴에 오래 남는 글을 보여줬던 고경태 편집장을 환영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