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살아 있는 사람과 닮아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을 맞는다. 바야흐로 어른이 되어 성숙한 시각을 갖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학에서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1605)가, 미술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1657)가 전환의 순간을 가져온 뒤 문학은, 그리고 미술은 늘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 영화에도 이런 순간은 비교적 일찍 찾아온다. 대표적으로는 1920년대에 버스터 키튼에 의해(<셜록 주니어>(1924)), 그리고 지가 베르토프에 의해(<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 영화는 영화 자체의 속성에 대해 되돌아보는 순간을 맞았다. 이런 태도가 1950년대가 되자 할리우드에서 대중과 만나는 일반 영화에까지 확산된다. 그만큼 영화는 영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도, 충분히 관객의 관심을 끌 만큼 대중화된 것이다.
50년대 영화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 인기
이런 흐름을 가져온 데는 스타시스템의 성장이 큰 배경이 됐다. 화려한 은막의 주인공인 스타들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고, 이들의 실생활을 알고자 하는 욕구도 높아졌다. 그들은 원래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작업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가 모두 궁금한 것이다. 1950년에는 이런 욕구에 응답하듯 영화 자체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 두편이나 동시에 발표됐다. 조셉 맨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과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가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에서 치열한 작품상 경쟁을 벌일 정도로 비평과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최종 승자는 <이브의 모든 것>이었는데, 지금 보면 운이라고밖에 수상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작품상을 받은 <이브의 모든 것>은 ‘영화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다루는 대상은 연극이지만, 영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연극을 소재로 삼았다. 허구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허구인데, 무대 위의 사실과 무대 밖의 사실이 너무나 흡사해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가 혼동될 지경이다. 영화 밖의 사람들의 관찰이 아니라, 영화인 스스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혼동되는 것은 무대 위의 스타와 무대 밖의 스타의 정체성이다. 그 상징적인 여성 스타 역을 베티 데이비스가 맡았다. 할리우드 최고의 눈을 가졌다는 배우다. 영화 속의 그녀는 한때 브로드웨이를 쥐락펴락한 스타였지만 지금은 마흔살을 넘겨 여배우로선 한계에 도달한 배우로 나온다. 그런데 베티 데이비스는 이 영화를 찍을 때 실제 나이도 42살이었고, 또 영화 경력의 황혼기를 맞고 있었다. 자신이 말했듯 윌리엄 와일러와 <제저벨>(1938), <작은 여우들>(1941) 등을 만들 때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고 당시는 정상에서 약간 밀려나 있었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 신경질적이고 조급한 늙은 배우는 그러니까 허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의 베티 데이비스를 충분히 떠올리게 했다. 베티 데이비스는 현실의 모습 거의 그대로 영화 속의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는 모든 스타의 이름
한편의 연극 공연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전형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황혼기를 맞은 대스타 마고 채닝(베티 데이비스), 그녀처럼 스타가 되고 싶은 야심찬 신인 이브 해링턴(앤 백스터), 열정적인 연출가, 명예욕이 높은 극작가, 오직 돈 버는 데 집착하는 제작자, 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저널리스트 등이 그들이다. 게다가 이들이 연기하는 인물의 성격도 아주 전형적이다. 40살을 넘긴 여배우는 경력에 위기를 맞았고, 신인은 그 자리를 탐내고, 연출가와 여배우는 연인관계이며, 돈 욕심을 상징하는 제작자는 뚱보이고, 또 다른 신인 여배우(마릴린 먼로)는 이 제작자에게 돌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아는 냉소적인 저널리스트는 이런 사실을 무기로 자기 권력을 쌓는다. 할리우드의 소우주가, 더 나아가 전세계 연예계의 소우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제목에 나와 있는 이름과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브가 아니라 베티 데이비스가 연기한 마고 채닝이다. 카리스마의 여성 스타다. 영화에서 이브는 마고처럼 되고 싶어하는 신인배우의 이름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알 수 있듯 스타를 꿈꾸는 모든 배우는 ‘이브’인 것이다. 그러니 ‘이브의 모든 것’은 ‘스타의 모든 것’과 유사어이다.
이브는 마고처럼 스타가 되고 싶어 우리 모두를 속인 채 사전에 작전을 짜고 마고에게 접근한다. 처음엔 여비서로, 그리고 대역으로, 최종적으로는 라이벌로 성장한 뒤, 스타의 자리를 결국 뺏는 것이다. 스타의 자리를 빼앗을 때 그녀의 모습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배반자이지만, 처음 스타에게 접근할 때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순수한 처녀였다. 그런데 이 모든 변신이 오로지 한 가지 목표, 곧 스타가 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브가 드디어 마고처럼 스타가 된 날, 꼭 이브처럼 닮은 시골에서 올라온 또 다른 처녀가 역시 과거의 이브처럼 스타의 숭배자인 척하며 이브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 처녀도 머지않아 ‘이브’가 될 것이다.
다음에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Sunset Blvd., 1950)를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