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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땅, 핍박의 대지에 서서
2001-11-14

이스라엘의 야만 고발하는 근본주의자 아모스 기타이

99년 칸영화제 시사회장, 경쟁부문에 오른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 <카도쉬, 성스러움>의 상영을 기다리는 자리였다. 주요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은 물론 영화 저널의 편집장들, 신문사 기자들, 영화 관계자들이 서로에게 조용한 눈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스라엘영화가 경쟁부문에 오른 것은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칸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수십편의 다큐멘터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극도로 예민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어온 아모스 기타이 감독의 극영화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열정적인 관심을 받을 만하다. 그때 칸영화제의 상영을 두고 아모스 기타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에서 <카도쉬…>가 상영될 때 매우 상징적인 두번의 순간이 있었다. 유세프 샤히닌(이집트 감독)이 그의 <타자>(역시 그해 칸에서 상영)라는 영화의 캐스트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 문제를 다루어온 그 용감한 사람을 관객 속에서 발견한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서 2500명의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 다른 약속 때문에 뛰어나가기 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짧은 침묵에 큰 의미를 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리고 망명

<카도쉬…> 이후 2000년에는 <키푸르> 그리고 올해의 <이든>으로 아모스 기타이는 칸에서 3회 연속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1972년 빛에 관한 실험영화인 <흑백>이라는 슈퍼8mm 실험영화로부터 시작한 40여년 가까운 영화감독의 삶을 여전히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아트하우스 극장과 유럽 방송사에서 그의 영화들이 집중적으로 보여지면서 대중적 관심 또한 높아가고 있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 그의 최근작 <이든>이 보여지며, 1회 전주영화제에서 <카도쉬…>와 다큐멘터리 <필드 다이어리>가 상영된 적이 있다. 그리고 11월 도쿄에서 아모스 기타이 회고전이 열린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세계적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을 때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들이 세계 영화지도 위에 중요한 지점으로 부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지금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 작업하지만 아모스 기타이는 이스라엘 군부 지도자들과 유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으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건축학 박사

아모스 기타이는 1950년 10월11일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생으로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베를린에서 일했다. 이후 그는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뒤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아모스 기타이는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슈퍼8mm로 실험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삶에서 원형적인 상처로 남는 사건은 1973 욤 키푸르 전쟁 당시에 일어났다. 그는 다른 이스라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징집되었고 주어진 임무는 헬리콥터로 부상자를 수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수송기가 폭격을 당했고 자신의 동료의 머리가 부서져 기내에 구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모스 기타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이 참혹한 경험은 <이후> (Ahare)(1974), <전쟁의 기억들> (War Memories)(1994), <키푸르> (Kippur)(2000)와 같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영화들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키푸르>에서 죽은 동료를 부둥켜안은 채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병사의 모습은 73년 전쟁의 그 사고현장과 중첩된다.

아모스 기타이는 1976년 버클리대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학자인 레오 로웬탈 등과 같은 진보적 철학자들로부터 사사했고 1977년 도시 공동체들에 대한 논문으로 건축박사 학위를 받았다. 77년 이스라엘 텔레비전에서 일했으나 <집>이라는 작품이 친팔레스타인적 내용 때문에 방영이 금지되었고 키부츠 등에서의 개별 상영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기타이는 이후 영화 제작을 더욱더 심각하기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건축을 전공하면서 몇개의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쟁 일지>(1982.3)로 레바논 침공 몇 개월 전에 완성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처음 만든 <전쟁 일지>는 유럽 전역에 방영되고 영화제들에서 상영되었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영화의 반-군사적 성격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상영되지 못했다.

세계 전역에서 다큐멘타리들을 만든 뒤 그는 1985년에 <에스더>라는 첫 번째 픽션을 만들었고 <베를린-예루살렘>과 <골렘-망명의 혼> 등을 만들었다. 1985년 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아모스 기타이 회고전이 열렸고, 유럽, 시드니(1986) 그리고 미국(1986)에서도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1992년 <유대인 전쟁>(기독교 시대의 첫세기)이라는 서사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이것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개막작으로 다시 공연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기타이는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던 시점에 장편을 찍었고 반-유대 범죄가 일어난 뒤 독일 부버탈에서 다큐멘터리 <부퍼탈 계곡에서>를 찍었다(변영주 감독은 이 작품을 자신의 다큐멘터리 베스트 10에 뽑곤 한다). 유럽에서 다시 파시즘이 발흥하는 것을 기록한 두편의 다큐멘터리는 브레히트가 경고했듯이 ‘야수’가 여전히 수태한 채 유럽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총통의 이름으로> <퀸 메리 제니비에>)

1993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1994년 도시 삼부작을 시작했는데 샤바티의 소설 <데바림>에 등장하는 텔아비브가 무대다. 그뒤 <욤욤>(1995) 그리고 <카도쉬…>(예루살렘)를 만들었다. <카도쉬…>가 칸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뒤 광범위하게 상업적으로 배급되었고, <키푸르>을 연출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한편으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또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기억이라는 역사적 시간-공간의 교차는 그의 작품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코미디영화인 <비술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in Vesoul)에는 팔레스타인 필름메이커인 엘리아 슐레이만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의 기억들>라는 일련의 프로젝트는 <키푸르>에서 완성된다. 1999년 그는 바르셀로나의 건축 전시 초청을 받아 <매스 퍼블릭 하우징>이라고 이름붙여진 10개의 비디오 모니터 설치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해체를 통한 확장

요리스 이벤스와 프레드릭 와이즈만 그리고 샹탈 액커만 그리고 크리스 마커의 다큐멘타리들이 그렇듯 아모스 기타이의 일련의 다큐멘터리들은 기존 다큐의 안과 밖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그 장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강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침묵과 동작 그리고 시선이다. 이렇게 비다큐멘터리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좌파로서의 아모스 기타이는 필름압수, 상영금지, 망명 등을 거치면서도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또 유대인 내부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이 그의 작품 속에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서 서유럽과 미국계 유대인들이 동유럽이나 아프리카계 유대인들을 2류 시민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든지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이 그것이다.

아모스 기타이는 유대사회의 전통과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사회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말하자면 종교와 그 모순을. 세속적인 국가와 근본주의자들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종교 그룹들은 시민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주적인 정신을 견지하면서 중동에 대한 좀더 이성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내가 유대의 전통에 충실한 방식은 그에 대해 비판적인 위치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 전통에 대한 존경이 바로 나로 하여금 비판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의 유대교는 무정부주의적이고 탈중심적인 것으로 종교적인 국가와 정반대의 것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제도에 종속되지 않고 바로 비판적으로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유대의 전통에 충실할 수 있다는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작업은 대단히 헌신적인 지식인-예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바우하우스의 계승자이며 아모스 기타이 역시 건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경력이 보여주듯 그의 영화에서 집, 땅, 공간, 공동체는 핵심적인 재료다. 그리고 이것은 땅을 둘러싼 분쟁으로 점철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집>(BAITm, 51분)이라는 1980년 작품에서 그는 이스라엘에 집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그 집에 대한 기억과 집착, 권리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집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필드 다이어리>에서도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무성한 땅의 상실을 애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온다. 또 1979년 팔레스타인들이 살던 지역에 이주한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의 폭동을 다룬 <와디 살립 폭동> (MEORAOT WADI SALIB)을 만들었고 또 1991년 <와디(1981∼91)-10년 후>라는 하이파의 와디 루시미아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외에도 그는 도시 삼부작이라는 시리즈물을 만드는데 하이파, 텔아비브 그리고 예루살렘, 그 세 도시를 차례로 찾아간다. <카도쉬…>는 바로 기타이의 도시 삼부작의 세 번째 작품으로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다. 종교적으로 강요된 가부장적 압제와 여성들의 그에 따른 수난을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촬영된 곳은 오소독스한 종교 공동체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른 아침에만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가편집본을 보고 나서 이스라엘의 ‘좋은 영화 장려 기금’은 “우리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바로 예술적인 이유로 이 영화를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칸 경쟁부문에 선정되었을 때 그 결정은 물론 전적으로 취소되어야만 했다. <이든>(EDEN, 이스라엘 2001)은 아서 밀러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1939년과 오늘날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을 아서 밀러의 동의를 얻어(그는 샘의 아버지 역으로 직접 출연한다), 1940년과 46년 영국령 아래의 팔레스타인으로 옮긴다. 영화는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시온주의의 신봉자이자 코뮤니스트 건축가 도브가 짓고 있는 건물에 벽돌들이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상주의자인 그는 유대계만이 아니라 아랍계 노동자들에게도 건축 기술을 가르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꿈에 부풀어 있다. 한편 그의 부인인 샘(사만다)은 그런 운동에 동참하면서도 남편이 자신을 등한시하는 것이 불만이다. 그녀는 비엔나에서 온 유대인 칼코프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한편 칼코프스키의 아내는 그 당시 점령군인 영국에 대항해 지하운동을 벌리다가 체포된다. 그뒤 자신의 부모들이 나치 수용소에 감금된 사실을 알게 된 칼코프스키는 목매달아 자살한다. 전쟁에 징집되어 갔다가 독일 여성을 강간하고 돌아온 코뮤니스트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한 샘은 칼코프스키의 시신을 본 뒤 충격에 빠진 채 거리를 배회한다. 팔레스타인 건설의 현장에서 유토피아적 시선으로 단정하고 희망차게 출발한 영화는 차츰 나치와 전쟁이라는 역사의 악몽 그리고 사적 관계의 헌신성의 문제와 얽혀들면서 비극적으로 끝난다. 아모스 기타이 영화의 특징은 바로 가장 미니멀하게 출발해 그것을 역사적, 정치적, 성적 차이의 힘들이 작용하는 복잡한 장치로 폭발시키는 데 있다. <카도쉬…>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은 이 장치의 모순들을 읽고 끌어내는 가장 예리한 관찰자이며 피해자다.

(아모스 기타이의 이력에 관한 부분은 2002년 파리에서 간행될 <아모스 기타이>, 세르지 투비아나, 폴 윌먼 편, Amos Gitai, edited by Serge Toubiana and Paul Willemen, Editions de l’Etoile, Paris 2002>의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얻어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필자)

아모스 기타이(Amos Gitai) 필모그래피

1974년 <이후>(Ahare)

1977년 <집>(Bayit)

1979년 <와디 살립 폭동>(Meoraot Wadi Salib)

1985년 <에스터>(Esther)

1989년 <베를린- 예루살렘>(Belin- Yerushalaim)

1991년 <와디(1981∼91)- 10년 후>(Wadi 1981-1991)

1992년 <골렘- 망명의 혼>(Golem, the Spirit od Exile)

1993년 <부버탈 계곡에서>(In the Valley of Wupper)

1994년 <총통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Duce) <퀸 메리 제니비에>(The Queen Mary)

1995년 <욤욤>(Yom Yom)

1997년 <비술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Vesoul)

1994년 <전쟁의 기억들>(War Memories)

1999년 <카도쉬, 성스러움>(Kodosh)

2000년 <키푸르>(Kippur)

2001년 <이든>(Eden)

김소영/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