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봉태규를 보면 한대 치고 싶습니다. <워킹맘>나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작품들에서 찌질한 젊은 남자 역을 그럴싸하게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편하겠죠. 사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봉태규가 늘 이런 역만 맡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의 탄생>의 경석이나 <두 얼굴의 여친>의 구창은 어떻습니까? 모두 그 정도면 준수한 청년들이죠. 경석의 경우는 조금 옹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지랖의 여신과도 같은 여자친구의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반응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이 두 영화에서 봉태규가 여자친구들에게 학대당하는 걸 보면서 변태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 간담회나 발표회에서 자연인 봉태규를 봐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요. 쓰윽.
여기서 재미있는 건, 봉태규에 대한 이런 감정이 캐릭터에 대한 혐오나 멸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단지 전 봉태규의 캐릭터들이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박해를 당하는 걸 보면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볼 때처럼 안도하게 됩니다. 자연의 법칙이 실현된 것 같아요. 봉태규 캐릭터는 수난을 당하는 게 정상이고 그가 실수로라도 그런 정상성에서 벗어나면 한대 쳐서라도 그 상태를 복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 봉태규씨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 저는 그가 관객의 존중을 받아 마땅한 영리하고 재능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태규가 낮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주연배우 자리를 유지해온 것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신기한 현상은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영화는 대부분 남자들이 만들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영화의 주인공에 투영합니다. 그리고 영화쟁이들 중 장동건이나 조인성처럼 생긴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죠. 그들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주인공 역을 봉태규에게 주려고 할 겁니다. 일단 연기가 되고 대한민국 남자들의 찌질함에 대한 묘사라면 이미 도가 튼 배우이니 가장 안정된 선택이지요. 봉태규가 한예슬, 차예련, 염정아, 정려원과 같은 후리후리하고 급수가 다른 미인들과 꾸준히 파트너가 되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 아무리 봉태규를 캐스팅한다고 해도 자신의 욕망까지 하향조절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들이 봉태규에게 온갖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양심있는 예술가라면 욕망을 충족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감독이나 작가가 여자라면? 역시 그들이 직접 현실세계에서 경험한 남자들을 그리기 위해 봉태규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장동건이나 조인성 같은 남자들을 현실세계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얼마 안 될 테니 말이죠.
근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건 좀 박한 것 같습니다. 봉태규는 사실 로맨스의 감이 꽤 좋은 배우입니다. 표현력도 좋고요. 우리나라 남자배우들은 (특히 잘생긴 부류일수록)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향이 강한데, 봉태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이미지를 망가뜨리더라도 속내를 감추지 않고 감정의 흐름을 정확하게 타지요. 저는 여전히 한예슬과의 로맨스가 무르익으려던 바로 그 순간, 정극배우가 되겠다고 <논스톱>을 떠난 그의 결정에 화가 납니다. 그 뒤에 대타로 등장한 현빈 캐릭터에 특별한 유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예슬/봉태규 콤비가 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화학반응은 최고였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그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지금의 스티븐 카렐이 그런 것처럼)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로맨스영화에 잘 적응하는 중년의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