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대 경성 재현 지수 ★★★☆ 김혜수의 노래와 춤 지수 ★★★★ 박해일의 능청연기 지수 ★★★★☆
1930년대 경성은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다양한 가치와 문물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 존재했기 때문이다. 갓, 짚신, 쪽 찐 머리는 실크햇, 백구두, 파마 머리와 공존했으며, 기생집과 주막은 무도클럽과 서양식 바와 나란히 운영됐고, 고루한 유교 관습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이나 나아가 사회주의적 사상과 동시에 설파됐다. 보기에 따라 매혹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모더니티의 시대는,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억압적 지배라는 정치적 배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결국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현실의 절반만 바라본 것이다. 이 이론은 근대화 이면에 자리한 조선 민중의 고통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던보이>가 자리한 곳은 근대화라는 가로 축과 일제의 억압이라는 세로 축이 교차하는 좌표 위다. 이해명(박해일)도 바로 그 결절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친일파 아버지를 둔 덕에 일본 유학을 다녀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그의 삶은 화려함과 즐거움에 둘러싸여 있다. 해명이 누리던 술과 장미의 나날은 어느 날 클럽에서 운명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을 만나면서 바뀐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인생을 걸지”라고 다짐했던 해명은 스스로 말하듯 ‘낭만의 화신’이 돼 난실에게 돌진한다.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 건물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그의 인생은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정지우 감독의 두편의 장편영화가 그랬듯 <모던보이>의 핵심에 자리한 단어는 사랑이다. 무모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이 사랑은 한 남자를 살인자로 만들기도 했으며(<해피엔드>), 첫사랑의 매혹에 사로잡힌 한 여성으로 하여금 이상한(?) 행위를 하도록(<사랑니>) 만들었다. 시종 껄렁한 해명은 앞선 두 사람보다 덜 진지해 보이긴 하지만, 애절한 사정은 매 한가지다. 테러리스트라는 누명을 쓰고, 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목숨까지 위험해져도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건 오직 난실의 사랑뿐이다. 그 또한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비루한 정체성을 자각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모던뽀이’로서 개인주의적 행복만을 좇던 그가 음험한 독립운동의 세계에 휘말리게 되는 것 또한 결국 그 절박한 사랑 때문이다. <모던보이>가 흥미로운 대목은 해명이 겪는 변화의 단초를 민족적 자각이나 독립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그의 일관된 내면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모던보이>는 해명이 겪는 운명의 반전이 그 모순된 좌표 자체에서 기인한 것임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계기에 대한 묘사는 허술한 편이다. 해명이 난실에게 홀딱 빠져버려 “인생을 걸” 각오를 하게 되는 근거는 다소 불투명하게 묘사된다. 뛰어난 미술적 구성, 감정을 휘감는 음악, 흠잡을 데 없는 CG 등 놀라운 기술적 완성도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긴장력이 떨어져 보이는 이유는 그 탓일 것이다.
tip/ <모던보이>는 이지민의 소설 <모던보이>(<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소설은 드라마 <경성스캔들>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30년대 경성의 사회상을 묘사하는 다른 책으로는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비롯해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근대 한국을 거닐다> <연애의 시대-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오빠는 풍각쟁이야-대중 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