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부터 10월2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아시아 독립영화 교류 상영 및 아시아 다큐멘터리 초정 상영’의 첫 번째 행사로 기획되었다. 총 19편이 상영되는 이번 기획전에는 일본의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작품이 아니라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극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동시대 일본과는 또 다른 모습을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영작은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주제는 ‘삶’, ‘예술’, ‘사회’로, 이들 작품 안에 현재의 일본이 거의 다 담겨 있다 할 수 있겠다. 일본 젊은이들의 고민, 당면한 사회문제, 예술가들의 발자취, 세계 속의 일본의 모습, 일본의 미래 전망, 과거사에 대한 성찰 등 다큐멘터리가 기록할 수 있는 무한한 영역을 탐사한 결과들이 모여 있다. ‘삶’을 다루는 첫 번째 섹션에 준비된 6편의 작품은 성장과 죽음, 가족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고, ‘예술’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섹션에 상영될 5편의 작품은 앞선 세대 사상가, 예술가들의 업적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에서 다큐 감독 야마기시 다쓰지와 쓰치모토 노리야키, 포크 가수 다카다 와타루, 음악비평가 간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현 일본 ‘사회’를 보여주는 세 번째 섹션에는 8편의 다큐가 준비되었다. 임시직을 전전하는 일본의 청년, 과거 피폭 피해자, 터키에서 온 난민 등 일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모습과 환경, 이데올로기 등 첨예한 사회 이슈들이 고루 카메라에 담겨 있는 섹션이다.
<미운오리새끼> 오노 사야카/ 2006년/ 75분
1984년생인 오노 사야카 감독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이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살 이유가 없다는 자기 비하감에 고통받는 사야카 감독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가족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안겨준 장본인이므로 용기를 내어 가족 구성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사야카가 생각할 때 가장 큰 상처는 5살 때 경험이다. 그때 그녀는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야마기시 유치원에 보내져 일년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버려졌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착한 딸”이 되려고 애써야 했다. 그 다음으로 큰 상처는 4학년 때 큰오빠로부터 얻은 것이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소년이었던 큰오빠는 사야키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을 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몸을 불결하다고 느끼며 살게 된다. 사야키는 가족들과 유치원 동급생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 흔적들을 재구성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옥죄었던 고통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이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유아의 훈육방식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는 면도 있다. 15년 전 야마기시에서 생활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현재 크고 작은 상처를 갖고 있었다.
<치즈와 구더기> 가토 하루요/ 2005년/ 98분
이 제목은 16세기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 메노치오의 우주관에서 따온 것이다. 우유에서 치즈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벌레가 생겨나는 신비한 일상에 대한 성찰을 축약한 말이 ‘치즈와 구더기’로 미시사가 진즈부르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다큐의 출발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가토 하루요 감독 엄마의 일상을 기록하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감독은 “죽으면 우주의 먼지가 되겠다”는 엄마의 말에서 이 제목을 떠올렸을 것 같다.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감독은 엄마가 치유되는 기적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리 냉정하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엄마가 눈을 감는 날이 찾아온다. 소소한 엄마의 일상과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하던 카메라지만 엄마의 마지막 순간만은 차마 담지 못한다. 필름은 이미 장례의식에 따라 염을 마친 엄마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다시 시작되는데, 철없는 조카는 엄마의 시신 옆에서 과자를 먹으며 장난을 친다. 장례를 마친 뒤, 감독과 딸을 먼저 보낸 나이 드신 할머니는 비디오테이프 안에 담긴 엄마의 생전 모습을 보며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한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치료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은 엄마와 새 텔레비전을 사서 기뻐하는 오빠 가족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담겨 있다.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 다큐가 많지만 삶의 바로 옆자리에 놓인 죽음을 일기처럼 기록한 이 영화의 담담함이 인상적이다.
<쓰치모토 노리야키의 다큐멘터리와 삶> 후지와라 도시/ 2006년/ 93분
쓰치모토 노리야키는 1970년대 화학공장에서 흘려보낸 수은 때문에 생긴 “미나마타병”으로 일본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미나마타 지역에 관한 17편의 다큐를 찍은 감독이다. 젊은 감독 후지와라 도시는 쓰치모토 노리야키의 삶과 그가 제작한 다큐들에 관한 영화를 찍기 위해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이 영화에는 쓰치모토 노리야키가 미나마타 지역을 찍은 유명한 다큐 <미나마타: 희생자들과 그들의 세계>(1971), <시라누이-바다>(1975)의 장면들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감독은 쓰치모토 노리야키와 함께 2004년 미나마타를 방문하여 과거 필름 속에 찍혔던 인물을 찾아가기도 하고 촬영에 얽힌 이야기도 듣는다. 쓰치모토 노리야기라는 거장이 들려주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삶과 다큐에 대한 철학,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영화다. 1960년대 그가 만든 <길 위에서>(1964), <기관사 조수>(1963) 같은 작품도 영화에 등장한다. 안전을 홍보하기 위해 철도청에서 제작 의뢰한 <기관사 조수>를 보고, 미국 평론가가 안전과 거리가 먼 모습을 지적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다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상실의 파편> 기무라 다쿠로, 미요시 히로키/ 2008년/ 10분
이번에 상영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다큐이다. 장편 위주로 기획된 이번 특별전에서 생부를 찾아가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그림자>와 <상실의 파편>만이 단편이다. 이 영화는 443분의 상영시간을 갖고 있는 야오야마 신지 감독의 <AA(음악비평가: 간장)>의 반대편에 놓일 수 있겠다. 단지 10분에 불과한 이 영화에 대사는 없다. 한편의 영상시처럼 느낌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영화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푸르스름한 화면에 비추는 것은 적막한 섬의 모습이 전부이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외딴섬의 풍경을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는 이 영화에 대해 감독은 주제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 섬을 배회하는 고양이들, 녹슨 자물쇠, 허공에 매달린 빈 빨래집게 같은 이미지들이 조합되었다. 도시 집중화라든지 노인문제 같은 사회적인 이슈는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쓸쓸한 현상에 대해 깊은 각인을 남긴다. ‘로보-코보’라는 독특한 감독의 이름은 두명의 감독이 모여 만든 팀 이름이다. 기무라 다쿠로와 미요시 히로키 감독은 2006년부터 팀을 꾸려 함께 활동하고 있다.
<조난백수> 히로키 이와부치/ 2007년/ 10분
어느 사회나 청년실업 문제는 가장 민감한 이슈일 수밖에 없다. 그 사회의 안정과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흔히 뉴스를 통해 통계 수치로 제공되는 실업률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 같은 문제는 개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캐논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감독 히로키 이와부치 자신의 이야기다. 잉크 카트리지를 분리하는 일을 하는 히로키는 한 시간당 1250엔을 받고 있지만 비정규직으로 계속 있다면 30년이 지나도 그의 급여는 달라지지 않는다. 캐논은 지난해 엄청난 이익을 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같다. 일하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이 빚 때문에 할 수 없이 일하는 히로키는 도쿄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시위에 참여한다. 그런 과정에서 <NHK>는 그에게 출연을 제의한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촬영을 마친 히로키는 사실을 왜곡한 방송을 보게 된다. 실업이 줄어들고 있다는 진행자의 말로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히로키는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다. 봄부터 겨울까지 히로키의 생활을 담은 이 영화는 일본의 노동 현실을 개인을 일상을 통해 조망하고 있다. 결국 일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히로키는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기록을 마친다.
<배, 산에 오르다> 혼다 다카요시/ 2007년/ 88분
히로시마현 북동부 하이쓰카 지역에는 산꼭대기에 커다란 뗏목형 배가 놓여 있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는 이 기이한 사건의 시작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댐 건설 계획이 세워지고 오랜 기간 반대운동이 벌어진 끝에 댐 건설이 착수되고 미로사키, 기소, 소료 마을이 물에 잠긴다. 이로 인해 20만 그루의 나무가 물에 잠기게 되자 PH스튜디오 그룹은 그 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 프로젝트를 설계한다. PH스튜디오는 건축가, 미술가, 사진가가 모인 그룹으로 다양한 작업들을 해왔는데 나무를 배로 만들어 산으로 보내는 이 작업에 12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1999년부터 나무를 모으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를 만들어 마침내 2005년 댐에 물을 채우는 날 배를 띄운다. 2006년 시험 담수가 끝나면 다시 물이 빠지고 배는 산 정상에 홀로 남게 된다. 혼다 다카요시 감독은 처음에 이 프로젝트의 전시용 영상 제작을 맡았다가 다큐 제작까지 하게 되었다. 감독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촬영을 진행시킬 동력이 되었고 이제는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산 정상에 놓인 거대한 나무배를 항공 촬영한 장면을 보면 감독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된다. 중간에 나오는 ‘에미키’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500년 된 푸조나무의 이사장면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