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흥미 지수 ★★★☆ 여주인공 매력 지수 ★★★☆ 유머 지수 ★★★☆
1960년생인 독일의 여성 역사가 아냐 로스무스는 10대 소녀 시절, 자신의 고향인 파사우에 대한 글짓기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2차대전 당시 행해졌던 나치당원들의 만행을 알게 됐다. 특히 그 지역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사였던 신문사 편집장이 당시의 만행을 이끈 전범에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로스무스는 자신의 부모 세대가 덮어버린 역사의 진실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공공기관의 자료 접근을 거부당하거나 네오나치주의자들의 무서운 협박을 받았고 이웃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수년의 노력으로, 로스무스는 1983년 책을 써냈다. 그 책 <저항과 박해: 1933~1939년 파사우의 케이스>는 독일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로스무스는 이어, 20세기 파사우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또 다른 저서 <자비의 그늘>을 내놓았다.
<더 걸>은 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소냐(레냐 스톨체), 소냐의 고향 이름은 필징(Pfilzing)으로 바뀌었다. 1인칭 화자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더 걸>은 십대 소녀의 순진한 시선을 통해서 나치의 인종차별에 가담했던 공범들을 감추고 자유와 평등, 경건을 찬양하는 전후 서독사회의 위선과 부정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때로 그것은 주인공의 섬세한 감정을 따르기도 하고 연극적 세트의 빈곤함과 일상적이지 않은 앵글, 반복되는 유머의 형식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이렇듯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유지됐던 거리는 마지막 순간 강렬하게 무너진다. 소냐는 자신의 역사적인 두 저서로 기념 동상까지 세워지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럼 이제 나더러 그만하라는 거냐”며 도망친다. 진실을 보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차가운 청동상 안에 굳어지려는 걸 그는 거부한다. 감독은 서두에서 이 영화가 아냐 로스무스의 실제 삶으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의 독일에 두루 적용시킬 수 있는 이야기라고 밝힌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 장면에서 길거리 외벽의 글귀를 비추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39∼45년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소냐 혹은 아냐 로스무스를 통해 벌어졌던 일들, 그 이후에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더 걸>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0년 초 완성됐다. 그해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TIP/ <더 걸>의 촬영은 파사우에서 이뤄졌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고향인 필징은 독일에서 존재하지 않는 도시다. 이 이름은 독일어에 있는 동사 ‘filzen’을 변형한 버호벤 감독만의 조어다. ‘filzen’은 ‘인색한’(stingy) 또는 ‘조심스러운, 과묵한’(retentive) 등의 뜻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