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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극장의 미래, 저예산 예술영화의 미래

<중경>

바람과 함께 여름이 사라졌다. 아침 잠을 깨우던 지겹던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8월인데 하고 방심한 사이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주간지를 만들다보면 계절을 앞질러야 할 때가 있다. 열대야에 시달리는 와중에 다음주엔 가을, 겨울영화를 소개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한여름에 무슨 소린가 싶지만 몇주 뒤에 바뀐 계절을 실감하게 되면 일찍 준비하길 잘했다 싶다. 물론 이런 일을 자주 하게 되면 계절 타는 기획을 습관적으로 내놓게 되기도 한다. 경험이 가르쳐준 대로 따라하다 식상한 메뉴라는 평판을 듣고서 뜨끔해지는 것이다. 이번호 인터뷰 가운데 가수이자 <중경>의 배우 샤오허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일관되게 생각해온 것 중 하나가 창작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좋은 길로 가기 위해, 아니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경험들이 축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경험의 결과 혹은 학습의 결과가 모방하거나 반복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의 말대로 경험은 창작의 가장 큰 적이다. 모든 노인이 경험의 축적만으로 현자가 되지 않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경험만이 바른길로 이끌지는 않는다. 많이 본 사람이 반드시 특정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적게 본 사람이 영화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험의 한계는 우리가 세상 모든 일을 다 경험할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남미나 중동의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나 미래의 일은 경험이 가닿지 못한 영역이기 십상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세상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번호에서 해외 평론가 9명을 만난 것도 한국의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통해 엿보고 싶어서다. 세계영화와 한국영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 몇명이 공통적으로 내뱉은 말은 내게 생각할 거리를 줬다. 베를린영화제 포럼 위원장 크리스토프 테레히테는 “과연 미래에도 저예산 예술영화들이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라고 묻고 <포지티프>의 평론가 알랭 마송은 “언젠가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박물관에 가는 것과 비슷한 경험으로 인식될지도 모르겠다”고 염려한다. 한술 더 떠서 영국의 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저예산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가망없는 개봉을 노리지 말고 재빨리 DVD로 출시하라”고 권한다. 디지털이 미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과 동시에 산업적으로 극장 중심의 영화문화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지적일 것이다. 디지털영화 혹은 저예산 예술영화들이 극장에서 고전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 터라 배급과 상영에 관해서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런 주장에 귀가 솔깃해진다.

지금의 극장 환경에선 좋은 영화들이 채 일주일도 되기 전에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이 반복된다. 꼭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특성에 따라 극장 중심의 영화문화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씨네21i에서 시작한 합법 다운로드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의문은 더 커진다. 극장 상영에만 매달리지 말고 수익은 합법 다운로드와 DVD 등 다른 채널에서 확보하는 길은 없을까? 극장>DVD>방송이라는 단계별 유통창구가 혹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일정한 제작비 이상의 영화에만 유리한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라는 경험적 진실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P.S. 필자 사정상 전영객잔을 한주 쉰다. 널리 양해하시길 빈다. 새 식구로 취재팀에 <무비위크> <필름2.0> 등에서 일했던 이화정 기자가 합류했다는 소식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