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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한가운데서 남긴 연명의 기록
김혜리 2008-07-03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이미 멸망한 땅 위에서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징벌일까? 더구나 당신이 어린 아들과 함께라면? 더더군다나 그 어린 아들이 맑은 눈동자로 “우리는 좋은 사람이죠?”라고 수시로 묻는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 코맥 매카시의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로드>는 영화 <미스트>의 몸서리쳐지는 마지막 장을 독립된 이야기로 만든 듯한 이야기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눈을 떠 옆에 누운 아들의 심장이 뛰는지 확인한다. 부자를 둘러싼 것은 식량과 자원이 바닥난 종말의 한가운데 놓인 세상이며 부모 눈앞에서 자식을 잡아먹는 지옥이다. 코맥 매카시는 대담무쌍하게도 소설 전체를 오로지 연명의 기록만으로 채웠다. 남자와 아들은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땅을 밟으며 무작정 해안을 향해 걷는다.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이라는 구절은 이 소설의 자화상이다. 심신이 모두 벼랑에 매달린 자의 꿈과 환각을 들락거리는 전지적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 시점처럼 느껴지는 건 금욕적인 문체 탓이다. 편집자는 결말부를 봉인해두고 “미개봉시 환불”이라는 자신만만한 방침을 선언하고 있다. 허겁지겁 뜯다가는 내지까지 덩달아 손상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