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혼자서 떠난 여행이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들은 전날의 과음으로 오지 못했고, 그는 애인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예쁜!)여자가 술을 사달라며 다가온다.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어쩌겠는가. 115분짜리 장편독립영화인 <낮술>은 이 찰나의 선택에서 빚어진 찌질한 여행담을 담고 있다. 모든 문제는 술에서 시작한다. 술을 사달라던 여자는 같이 바다에 가자며 남자의 기대를 부추기지만, 갑자기 나타난 애인과 사라진다. 다른 여행지에서 다시 만난 이 커플은 역시 남자에게 술을 권하며 다가온 뒤, 다음날 아침 그의 바지를 벗기고 지갑을 뺏어 도망간다. 이야기 그대로 <낮술>은 ‘술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구를 지닌 교훈극이다. 술을 권하며 호의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선의로 믿어야 할지, 불의로 의심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돌아가고픈 마음과 남자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귀향을 미룬다. 이 여행의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낮술>은 오로지 이야기의 힘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독립영화에서 의례적으로 볼 수 있는 미학적 실험이나 심각한 주제는 없다. 심지어 빛이 있어야 할 장면에서는 빛이 없고, 포커스는 종종 빗나가며 편집은 거칠다. 게다가 <낮술>을 연출한 노영석 감독은 습작으로 만든 하나의 단편영화 외에는 필모그래피가 전무한 감독이다. 하지만 <낮술>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를 시작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포럼을 웃음으로 달구었고, 많은 상업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영화제의 운영일정상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여러 해외영화제에서도 경쟁부문에 자리를 내놓고 있는 중이다. 어느 기회를 빌려 감독을 만나볼 수 있을까 싶던 차에, 마침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오는 6월30일 인디스페이스에서 <낮술>의 쇼케이스를 연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노영석 감독은 인터뷰를 위해 커피숍으로 가자는 제안에 머뭇거렸다. “그냥 술이나 한잔 하시는 건 어떨까요? (웃음)” 자연스레 인터뷰는 낮술과 함께 했고 ‘낮술’은 ‘밤술’이 됐다.
-요즘도 영화제 순례를 하고 있나. =요즘에는 곧 있을 쇼케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은 원주에서 <낮술> 상영이 있다. 그곳 문화센터의 소장님을 전주에서 뵌 적이 있는데 상영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튕길 형편도 아니고, 또 돈도 주신다고 하기에. (웃음)
-<낮술>을 본 사람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 =어떤 분은 극장을 나오면서 자신이 술을 마시고 나온 것 같다고 하셨다. 또 어떤 기자는 집에 가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컵라면이랑 소주를 사서 먹었다더라. 실제로 먹어보면 별맛은 없는데. (웃음) 영화에도 주인공 혁진이 먹다가 버리지 않나. 그냥 그렇게 별거 없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장면인데, 사람들에겐 정말 맛있게 보였던 것 같다.
-<낮술>은 어떻게 구상한 영화인가. 일단 개인의 여행담일 것 같다. 실제 주인공처럼 여자에게 당하거나, 돈을 뺏긴 적도 있나. =그런 일을 당한 적은 없지만, 경험에서 시작된 건 맞다. 영화에 나온 펜션이 내가 한때 시나리오 쓰려고 묵었던 곳이다. 술이 먹고 싶었지만, 꾹꾹 참으면서 지내다 서울로 왔는데, 자꾸 그때 생각이 나더라. 만약 그때 옆방에 어떤 여자가 혼자 여행을 왔다면 어땠을까. 우와~ 이거 최곤데, 죽인다. (웃음) 그러면 내가 말을 걸었을까? 못 걸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메모를 하다가 이야기를 구상한 거다.
-<낮술>의 이야기는 매우 직선적이다. 처음으로 만든 영화인데도 형식적인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애당초 접었던 부분이다. 내가 그럴 능력도 아니고. 우선은 영화 한편을 어떻게든 완성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런 걸 다 집어넣으려면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 됐을 거다. 사실은 나도 좀 아쉬운 부분이다. 잘하려고 한 건데 포커스도 많이 나가고. 어떤 관객은 술에 취한 주인공의 시점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게 아니냐고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단편을 몇번 만든 뒤 장편을 만든다. 그런데 처음부터 장편을 연출했다. 단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 했던 건가. =무식하니까 용감했던 거다. (웃음) 그동안 장편으로 써둔 시나리오도 몇편 있었고, 평소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도 좋아했고,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다보니 은연중에 연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었지.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내가 최고의 영화를 만들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웃음)
-그래도 영화를 연출하는 입장에서 뭔가 다른 걸 보여주겠다는 건 있지 않았을까. =독립영화도 가벼울 수 있다는 거? (웃음) 사실 나부터 독립영화를 잘 안 본다. 평소에도 어려운 영화를 보는 편은 아니었고, 독립영화라고 해서 꼭 그렇게 심각한 것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역시 건방진 이야기지만, 심각한 독립영화여도 제대로만 만들면 너무 좋은데, 내가 봤던 영화들은 멋부리는 모습이 많아서 싫었다. 그냥 웃으면서 찍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데 왜 고민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말한 그대로 <낮술>의 주제는 매우 가볍다. ‘술이 원수다’, ‘먼저 다가오는 여자를 조심해라’ 정도? =그런 거다. 그런데 관객이 내가 생각 못한 걸 많이 발견해주었다. 어떤 분은 88만원 세대의 고뇌와 방항을 다룬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영화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 하는 이야기인데,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느낌이 있다. 심지어 주연배우인 송삼동은 은근히 김상경을 닮았더라. =김상경이랑 닮아서 캐스팅한 건 아니었는데 촬영할 때 보니 정말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분명 <생활의 발견>에서 받은 영향이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과연 이게 재밌을까 싶었는데, <생활의 발견>을 생각해보니까 가능할 것 같더라.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었다.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 정도? <강원도의 힘>은 조금 보다가 다 보지 못했고.
-<구타유발자들>의 오마주도 있다고 하던데. 개울가에서 고기 구워먹는 장면을 말하는 건가. =그 장면은 오마주가 아니었다. 평소 겨울에 그렇게 술 먹는 걸 좋아해서 넣은 거다. 진짜 의도한 오마주를 발견하기가 힘든 것 같던데, 비닐하우스 장면에서 이런 대사가 있다. “이 고기가 옆동네 오근이 형이 때려잡은 거야.” “벤츠도 살 거라는데? 오근이가 얼마나 벤츠가 사고 싶었을까?” 이런 대사다. <구타유발자들>은 정말 좋아한 영화였다. 특히 영화에서 먹는 생삼겹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너무 먹고 싶더라. 정말로. (잠시 침묵) 와~ 소주 댓병을 하나씩 들고 마시는데 너무 좋더라. (웃음)
-혁진에게 먼저 말을 거는 여자 중 이란희란 캐릭터가 독특했다. 남자가 자신을 멀리하려 하자 바로 욕을 날리는 여자인데, 인상이 매우 독특했다. 실제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 =보통 남자들은 기차를 탈 때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공상을 많이 하지 않나. 물론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없지. 그래서 예전에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는 음료수를 2개씩 샀다가 2개 다 마시곤 했다. (웃음) 아무튼 그때 펜션을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으셨다. 나보다 3, 4살 정도 많아 보였는데 옆에서 계속 말을 거는 거다. 내가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도 서울에 살았다면서 말이다. 솔직히 귀찮았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미인이 옆자리에 앉아서 그렇게 물으면 어땠을까 싶더라. 시나리오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당장 따라가지 않았을까? (웃음) 그런 간사함이 재밌더라.
-1천만원의 제작비를 어머니가 대주셨다고 하더라. 어떻게 달라고 했나. 많은 독립영화인들에게 팁이 될 수도 있다. =글쎄, 팁이 될 만한 건 없을 것 같다. (웃음) 우리집이 남양주에서 피노키오 냉면이란 냉면집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냉면이 정말 잘 팔렸다. 집에 어느 정도 돈이 있겠다 싶었던 거지.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돈 달라는 이야기도 못했을 거다.
-<낮술>은 제작비 지원 공모에 내본 적이 없나. =<낮술>도 지원했고, 그전에도 몇년 동안 쓰는 시나리오마다 지원 공모에 냈다. 하지만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다. 처음 지원한 공모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하던 시나리오 공모였다. 열심히 쓰면 되겠지 싶어서 정말 빠르게 써서 냈다. 그런데 정말 된 거다. 첫 공모에 덜컥 붙다니, 난 정말 천재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웃음) 그때 1등 당선작이 <구타유발자들>이었다. 제목이 재밌네, 하면서 다시 내 이름을 봤다. 그런데 옆에 쓰여 있는 제목이 내가 쓴 시나리오의 제목이 아니더라. 뭐지? 하면서 다시 감독이름을 봤는데, 노동석이었다. (좌중 폭소) 그때 쓰여 있던 제목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였을 거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도 노동석 감독님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한번은 한겨레 연출학교를 다닐 때 강사로 오셨는데 안 갔다. (웃음)
-각본, 연출, 음악, 미술, 촬영을 혼자 다 했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겠지만 욕심은 없었을까 싶더라. =경제적인 게 제일 컸다. 내 형편에서 같이 하자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적인 걸 강조하고, 고집이 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럴 바에는 내가 하자고 했던 거다. 솔직히 너희가 얼마나 잘 찍기에 하는 건방진 생각도 있었다. (웃음)
-공예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졸업한 뒤에는 음악을 했고, 그러다 영화를 만들었다던데. =내 성격이 원래 하나만 파지를 못하는 것 같다. 생겨먹기가 잡식성이다. 원래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는데, 음악으로 대학을 가기에는 실기가 안 되겠더라.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미술을 공부했다. 나중에는 음악이 또 하고 싶어서 앨범을 내보려고 했었지.
-본인이 가수로 데뷔하려고 했던 건가. =(잠시 머뭇) 그게… 그렇다. (웃음)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보니 그런 준비를 했었다. 나름 내 계획으로는 음악으로 돈 벌어서 서른두살에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때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앨범만 내면 돈을 벌 줄 알았던 거지. 나중에는 내 능력이 안 된다는 걸 알겠더라. <낮술>에도 음악을 직접 넣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니까 한 거였다. ‘내 능력을 보여주겠다!’ 이런 건 아니었다.
-쌓아둔 시나리오가 몇편이나 되나. =앞으로 살면서 언젠가는 찍어야지 했던 게 6편 정도 있다. 사실 <낮술>은 꼭 찍어야겠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지원 공모에서 떨어지니까 아예 내가 해봐야겠다 싶어서 한 거지.
-상업영화에서 제의가 온다면 그 시나리오 중 어떤 작품을 연출하고 싶나. =정말 아끼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스탠 바이 미>와 이와이 순지의 <불꽃놀이, 아래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에 황순원의 <소나기>가 섞인 이야기다. 일종의 시대물인데, 내가 유년기를 보낸 80년대의 이야기다. 88올림픽 즈음에 실제로 유괴사건이 많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다룬 거다. 하지만 이건 지금보다 공력이 세지면 만들고 싶다. 정말 잘 찍고 싶기 때문에 막상 시작하기에는 우려되는 게 많다. 그런데 또 지금이 아니면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투자를 하겠다는 제의가 그나마라도 있을 때 해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분위기 좋을 때 땡겨줘야 하는 거니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