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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2008 놀이문화

요즘 축구팬의 즐거움은 유로2008 시청이다. 월드컵에 버금가는 대회라 여러 가지 화제를 낳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진 다음 프랑스 대표팀 감독이 한 말이 걸작이다. “이번 패배로 사임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프랑스팀 감독 레이몽 도메네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한 가지 프로젝트만 갖고 있다. 그것은 결혼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아름다운 일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엉뚱한 대답은 곧 결혼할 예정인 연인을 향한 프러포즈다. 패배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개인적인 사랑고백으로 응답한다? 이건 자신을 향한 질타를 피하려는 말돌리기일 수도,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한 성실한 대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뒤에 나온 말로는 더없이 인상적이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꽤 열을 받았겠지만 프랑스 국민의 성토가 극에 달했다는 후속보도는 보지 못했다. 대신 프랑스 축구협회는 이런 일이 있은 뒤에도 “충동적으로 해임을 결정할 생각은 없다”는 성숙한(?) 자세를 보였다. 대표팀 경기만 하면 광기에 휩싸이는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는 축구를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 말했다지만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이런 태도는 괜한 핑계를 대거나 죽을 죄를 지은 양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신선해 보인다. 때로 예기치 않은 가벼움이 이성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방책이 된다.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상적인 대목도 엄숙주의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이다. 대통령을 조롱하고 정책을 풍자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늘 엄숙한 얼굴이던 정치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전경버스에 써붙인 ‘2MB를 실을 버스입니다’라는 플래카드, 경찰 컨테이너에 붙여진 ‘명박산성’이란 이름, 물대포를 맞으며 ‘온수’를 연호하는 센스 등 상황은 심각해도 사람들은 촌철살인의 유머로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 웃음은 공포에 대한 반응이라는 말을 요즘처럼 실감할 때가 없다. 이러다보니 이문열씨가 “촛불장난을 너무 오래하고 있다”고 핏대를 세운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엄숙주의 속에 살았던 늙은 작가가 보기에 이것은 ‘시위’가 아니라 ‘장난’이다. 어딘가 예전 시위랑 다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는 뜻 같다. 물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촛불시위를 의병으로 맞서자고 하며 자신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드러냈다. 모두가 국가원수의 뻘짓을 놀잇감으로 삼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나 써먹던 의병으로 그게 막아지나? 인터넷도 모르고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는 상대이다보니 풍자로 무장한 시민과 전경 방패로 무장한 청와대 사이의 골은 영영 메워지지 않을 것 같다.

주성철 기자가 알려줘서 풀빵닷컴 사이트에서 김풀빵이란 사람이 만든 <본 얼티메이텀> 패러디 동영상을 봤다. 영화장면을 절묘하게 편집해서 광우병 관련 내용으로 한국어 더빙한 UCC인데 배를 잡고 웃었다. 맷 데이먼이 촛불시위에 나갔다 교사에게 혼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본을 잡기 위한 정보기관의 회의가 촛불시위에 대한 청와대 대책회의로 둔갑하는 이 영상은 배후가 없어도 민심이 폭발하는 이유를 한눈에 보여준다. 정부가 하는 일이 모두 코미디이거나 코미디의 소재이다보니 비웃음만큼 효과적인 저항이 없다. 이러다간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온 국민이 정치풍자의 달인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P.S. <씨네21>에서 취재, 편집을 해보고 싶은 분이 많을 줄로 안다. 조건이나 대우보다 경험을 쌓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객원기자 모집에 지원하시길. 142쪽 게시판에 객원기자 모집공고를 참조하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