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에게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색, 계>는 50쪽이 겨우 넘는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영화가 왕치아즈와 리의 과거와 현재를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통해 탄탄하게 쌓아가는 반면, 장아이링의 원작은 상하이에서 재회한 둘의 관계에 주목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줄거리는 물론 인물들의 심리까지 녹여, “영화적 감각이 살아 있는 소설”이라는 평과 문단에 발표한 뒤에도 30년에 걸쳐 고치고 다듬었다는 뒷이야기가 실감난다. 이 책에는 표제작 외에도 <망연기> <머나먼 여정> <해후의 기쁨> <못잊어> <재회> 등 단편 6편과 희곡 <연애는 전쟁처럼>이 실렸다. 장아이링의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다. 24살에 초혼에 실패하고 루머와 가십의 주인공이 되어 여자로서 또 작가로서 은둔하다 끝내 미국으로 떠났던 격정적인 개인사가 투영된 듯, 작중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통찰이 뛰어나다. 전쟁을 겪은 대륙과 홍콩의 공간적 배경을 통해 상실과 혼돈이 가득한 시대감을 살려낸 것도 소설을 읽는 포인트. 간혹 작가임을 숨기지 않고 중간에 등장해 소설이 아니라 수필인 척하는 문체가 재밌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탁월했던 리안의 ‘행간을 채우는 능력’을 재확인하는 기회도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