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인권영화제는 뜻밖의 공간에서 열린다. 버릇대로 서울아트시네마나 아트큐브를 찾았다간 낭패다. 5월30일부터 6월5일까지 12회 인권영화제가 주요 둥지로 택한 곳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일부 상영은 서울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이뤄진다). 아늑한 극장 대신 번거로운 야외상영을 택한 건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허용하는 작은 틈새에 만족하지 않고” 현행 심의제도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다(). 영화제 중에는 시민심의위원 10명(청소년 포함)과 추천을 통한 심의위원 9명으로 구성된 ‘표현의 자유 19조 위원회’도 활동한다. 위원회 이름은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갖는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9조에서 따왔다. 위원회는 상영작 공개심의 과정 및 결과를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모두 공개한다. 현행 등급분류 제도의 한계를 넘어 대안 심의가 가능함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이다.
야외상영이어서 분위기가 어수선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특히 개막작 <파벨라 라이징>은 외려 극장 바깥에서 상영해야 더 어울리는 다큐멘터리다. 빈민촌 혹은 갱들이 지배하는 범죄구역으로만 알려진 브라질의 파벨라에서 “음악을 통해 지역자치운동을 벌이는” 아프로레게 그룹을 다뤘다. 미성년 아이들이 한손엔 장총을 또 한손엔 마약을 들고 파괴의 신 시바를 추종하는 장면에서 움찔하고, 10여년 동안 경찰과의 총격전으로 선량한 마을 사람 4천명이 죽어나간 사실은 끔찍하지만, 폭력으로 얼룩진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아프로레게 그룹의 흥겨운 리듬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 “평화를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며 파벨라 잔류를 택한 그룹 멤버들의 증언이 진심에서 우러난 약속임을 후반부에 확인할 수 있다.
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들이 폐막작으로 택한 작품은 이탈리아 보고서 <사고 파는 건강>이다. 개막작 <파벨라 라이징>이 폭력 아래 놓인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사고 파는 건강>은 반대로 인간을 궁지로 밀어넣는 시스템을 고발한다. “신약품의 끝없는 공급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만 제약산업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말로 운을 떼는 이 다큐멘터리는 의사가 넘쳐나는 북반구 유럽과 필수의약품이 없어서 매년 1500만명씩 죽어나가는 남반구의 아프리카를 대조하며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거대 자본의 도마 위에 오른 참극의 상황을 다각도로 추적한다. 손쓸 도리가 없는 괴물이 된 미국 석유회사 엑손모빌을 다룬 <기울어진 세계>와 비교해보는 것도 도움될 만하다.
해외 상영작 중에는 사이비 민주주의에 대한 폭로를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다. <미국, 민주주의를 침략하다>는 침략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허울 좋은 간판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남미를 잠식한 파렴치 국가 미국의 기만을 고발한다. <콜리지알스, 민중의 의회>는 정치인들의 민주주의에 속아왔던 아르헨티나 민중이 직접 나서 민주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을 그렸다. <투표하는 날>은 2004년 미 대통령 선거 과정을 보여주면서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참여 방식인 투표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해 독일문화원 등이 주최한 국제단편경선 수상작 모음 부문의 <나를 감시하지 마>도 동등한 기회 보장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이 실은 체제 선전에 불과한 것임을 일러준다.
한국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경향을 읽어내기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복합증후군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일별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안녕! 허대짜수짜님>의 비정규직과 <천막>의 비정규직이, <진옥언니 학교가다>의 장애인과 <잘있어요, 이젠>의 장애인이, <거리에서>의 노숙인과 <밥>의 노인이, <오월상생>의 민중가요와 <필승 ver2.0 연영석>의 노동요가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현장에 가면 다큐멘터리 제작한다며 촬영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정작 결과물로 나오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인권영화제 김일숙 활동가는 “이번 영화제의 경우 한국쪽 출품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문제제기를 한 지 오래됐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사회의 쟁점들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진도 간첩 조작사건으로 18년 동안 수감됐던 박동운씨의 뒤늦은 변론 <무죄>, 세계화의 흐름에 부식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녹슨 몸을 묘사한 <철을 끄는 사람들> 등도 인권영화제 강력 추천작. 자세한 상영일정은 <씨네21> 게시판(142쪽 참조)이나 영화제 홈페이지(http://sarangbang.or.kr)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