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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영화제 미리 보기 1] 名不虛傳, 작가의 세계
씨네21 취재팀 2008-05-01

에릭 로메르부터 지아장커, 수오 마사유키, 김동원까지 기대를 모으는 이름들

<소설> The Obscure 2007년│ 류우에 │ 87분 │ 중국

오우삼의 <적벽대전>, 펑샤오강의 <집결호>, 더 거슬러올라가면 장이모의 <인생>. <소설>을 연출한 류우에의 경력은 촬영감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자오선생> 외에도 <미인초> <십삼괘포동>을 연출했으며 <소설>은 그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그리고 류우에는 네 번째 연출작 <소설>에 이르러 이를 데 없이 비범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마침내 탄생시켰다. 중국의 유명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인생과 시와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 그 자리에 진행 보조원으로 자리한 한 여자가 있다. 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그 여자가 문득 이 호텔에서 지난 과거의 남자를 재회하면서 허구의 이야기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둘은 서먹함과 반가움으로 재회를 기념하며 아이같이 즐거워하지만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는 동안 헤어져야 하는 것에 슬퍼한다. 류우에는 다큐멘터리로 찍어낸 중국 유명 문인들의 난상 토론의 장과 그곳에 있던 한 여자의 소설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겹쳐 애환과 로맨스의 감정을 끌어낸다. 이 영화의 형식 자체가 실재와 허구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로맨스다. <소설>은 비범한 형식 외에도 배우들의 친밀하고 그윽한 연기(특히 첸카이거의 <투게더> 등에 출연했던 남자배우 왕지웬의 연기가 뛰어나다)가 큰 공감을 준다. 그들의 하룻밤을 보면서 쓸쓸한 상념을 느끼지 않기란 아마 어려울 것이다.

<무용> Useless 2007년│ 지아장커 │ 81분 │ 중국

지아장커는 다큐멘터리 <무용>이 화가 리샤오동을 주인공으로 했던 다큐멘터리 <>에 이어지는 “아티스트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세개의 일화로 나뉜다. 광둥지방의 의류 공장이 첫 번째 무대. 두 번째가 파리에서의 패션쇼를 준비하는 혁신적인 패션디자이너 마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세 번째는 지아장커가 늘 그리는 산시성 펀양의 광산지역, 그중에서도 허름한 양장점, 이곳에서 일하는 시골 재봉사와 이 마을 광부들이 주인공이다. 시골 재봉사를 묵묵히 지켜볼 때, 빨랫줄에 걸린 광부들의 옷에 잠깐 스치는 바람을 놓치지 않을 때, 목욕하는 광부들의 검댕 묻은 육체와 입가의 웃음을 담을 때, <무용>은 한폭의 회화다. 두 번째 일화보다 첫 번째가, 첫 번째보다 세 번째 일화가 뛰어나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세 번째 일화는 전작 <스틸 라이프>의 위대한 정물화적 필치 그 이상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 63 Years On 2008년│ 김동원 │ 60분 │ 한국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금비녀를 내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락의 여자는 제1전선에 이끌려 나가 병사의 취사 및 간음에 바쳐진다.” 일제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여성들의 몸까지 수탈했고,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던 전선에서 식민지 여성들은 피를 흘렸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전쟁>은 바로 그 60여년 전의 치유 불가능한 시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리고 하꼬방에서 황군들의 폭력을 견디며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한국,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출신 여성들의 분한 목소리를 담는다. 망각조차 두손 든 이들의 끔찍한 상처, 그 앞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카메라는 서서히 자문한다. 종전 뒤에도 여전히 비극이 지속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63년 동안 계속돼온’ 소리없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전장에서 태어나 ‘외계인’이라 놀림받았던 아들들이 ‘더러운 계집’이라 조롱받았던 어머니의 품에 기꺼이 안기는 장면들은 비극의 지속을 방관한 복수의 가해자들을 뜨끔하게 만든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 2007년 │ 크리스티안 네메스쿠 │ 155분 │ 루마니아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위한 군사장비를 실은 기차가 루마니아의 간이역에 발이 묶인다. 마을의 실력자이자 기차역의 책임자인 도이아루는 세관 문서를 요구하며 수송열차를 호위하는 미군 지휘자에 맞서고, 사람과 소가 같은 길을 사용할 정도로 작은 마을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이들로 인해 분주해진다. 도이아루의 딸을 비롯한 마을의 젊은 처자들은 앞을 다퉈 미군에 돌진하다시피 몸을 던지고,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알릴 절호의 기회라 여기며 행동을 개시하며, 마을 시장은 미국의 어딘가와 끈을 댈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로 그저 바쁘다. 외모와 영어실력은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떠오른다. 착잡함과 유머, 애증이 몸을 섞는, 루마니아식 리얼리즘의 애틋함이 절묘하다. 언제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줄 아는 핸드헬드도 큰 몫을 했다. 2007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수상작. 촬영 이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네메스쿠 감독의 미완성 유작이기도 하다.

<로맨스> Romance of Astrea and Celadon 2007년 │ 에릭 로메르 │ 109분 │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목가소설 <아스트레>를 원작으로 88살의 에릭 로메르가 완성해낸 신작(원제는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사랑>). 미남 목동 셀라동은 착한 시골 처녀 아스트레와 연인 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 셀라동이 다른 여인과 있는 장면을 본 아스트레는 그가 변심했다고 생각하여 더이상 그를 만나지 않는다.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는 아스트레를 보고 셀라동은 강에 투신하여 결백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셀라동이 강물에 뛰어들자 아스트레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하지만 요정들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 셀라동. 그는 요정들에게도 인기를 얻게 되지만 오로지 아스트레 생각뿐이다. 셀라동은 여장을 하고 아스트레를 찾아가기로 한다. <로맨스>는 간결하기 그지없다. 17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대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최소한의 소도구와 배경만 있는 프레임 안에서 때때로 발생하는 우연들을 인정하며 단지 서성거린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영화 같다. <로맨스>는 그러나 영화가 어떤 물질이 되고, 그 물질 중에서도 무색무취의 공기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거대한 기하학적 형상, 우연의 결정적인 간섭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로메르는 전하고 있는데, 그건 이 영화의 폭넓은 경이로움에 대한 힌트 중 일부일 뿐이다.

<노르망디로의 귀환> Back to Normandy 2007년 │ 니콜라 필리베르 │ 113분 │ 프랑스

<노르망디로의 귀환>을 이해하려면 1976년작 <나, 피에르 리비에르>라는 영화의 존재를 알 필요가 있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르네 알리오 감독이 노르망디에서 실제로 일어난 친족 살인사건에서 소재를 얻은 영화로 주·조연급을 모두 현지인을 기용해 만들었다. <노르망디로의 귀환>은 당시 조감독이었던 니콜라 필리베르가 2006년 노르망디로 돌아가,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 출연했던 사람들의 30년 뒤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악역으로 출연해 연기와 실재를 혼동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은 일화를 소개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가족 모임의 만년 화제라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한다. 젖소와 돼지를 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카메라와 필름이 가져다준 센세이션은 어떤 것이었을까. 필리베르의 표면적인 의도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는 후반 30분부터 공개된다. 영화 출연진 중 가장 궁금한 인물, 살인자 리비에르를 연기한 클로드 에베르의 소재를 찾던 감독은 그가 아이티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I Just Didn’t Do it 2007년 │ 수오 마사유키 │ 143분 │ 일본

비좁은 출근시간 전철에 가까스로 오른 가네코 텟페이는 교복 입은 소녀에게 소매를 잡히고, 면접을 보러 가던 길은 경찰소, 구치소를 거쳐 법정으로 이어진다.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치한으로 몰린 남자가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거치는 지난한 과정을 성실하게 보여주는 법정극이다. 전작에서의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거두고 일본의 사법제도에 경종을 울리는 성찰적인 색깔을 더한 것이 신작의 특징.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해 가네코에게 치한의 낙인을 찍은 법정은 정의와 위엄에서 가장 멀리 있고, 진실을 밝히는 자리로서의 법정을 바랐던 가네코는 결국 2년의 재판을 거쳐 4개월형을 언도받는다. 판사의 긴 설명을 선 채로 견딘 뒤 항소하는 가네코의 목소리로 마무리하는 영화는 인간이 만든 제도가 낳은 또 다른 피해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여운을 남긴다. 일본 영화지 <키네마준보>가 ‘2007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한 수작.

<실록 연합적군> nited Red Army 2007년 │ 와카마쓰 고지 │ 190분 │ 일본

1960년부터 시작된 일본 학생운동의 연대기는 다섯명의 적군파가 아사마 산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체포되는 19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흑백의 실제 자료화면과 이후 연출된 화면의 비율은 자연스럽게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고, 기나긴 프롤로그가 언제쯤 끝나려나 싶은 어리둥절함 속에 정신을 차린 관객은 자신들이 연합적군의 동계 군사훈련 기지의 지독한 밀실까지 흘러들어왔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운동에 투신한 동지들은 ‘공산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자아비판을 강요한다. 질투는 의심으로, 의심은 아집으로, 아집은 처형으로 이어지는 아찔한 추락. “살고 싶다”고 울먹이는 여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얼굴을 구타하게 만든 이들의 무표정한 클로즈업에 이르면 인간에 대한 지독한 비관으로 스크린은 끓어넘친다. 60년대 혁명의 열기를 성과 폭력, 정치를 키워드 삼아 관통했던 와카마쓰 고지가 걸어온 길을 기억한다면, 여러모로 자멸의 실록(實錄)이라 할 만한, 대단한 증언이다. 이것은 모두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