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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떠나거나 혹은 정착하거나 [1]

<경축! 우리사랑>을 보며 궁금해진 한국영화 속 장소의 욕망과 표현

하숙집 주인의 여식과 가난한 하숙생 사이의 사랑은 오래된 소재다. 그들의 관계는 조그만 앞마당에서 은밀한 눈인사로 꽃피며 결과는 대체로 둘 중 하나다. 둘의 사랑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지속적일 때 그들은 죽어서도 잊지 않는 사랑의 전범으로 남으며 행복한 결말에 도착한다. 슬픈 결말에 이르러야 할 때는 하숙생이 하숙집 딸을 배반한다. 남자가 그 집을 떠나고 여자가 홀로 남는다. 하지만 여자는 홀로 남지 않고 그가 남긴 혈연의 징표를 갖고 남는다. 여자는 임신한 채 남는다. 집 바깥을 벗어나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맹세한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 여자는 기약없는 기다림의 인생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소재 혹은 허름한 동네 어딘가에서 들어본 풍문 혹은 철지난 농담 속의 하숙집 딸과 하숙생의 이야기는 상투적이지만 그렇게 둘 중 하나다.

시작이라면 오점균의 <경축! 우리사랑>도 다를 바가 없다. 하숙생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고아로 자란 청년 구상(김영민)이다. 그는 “방통대 졸업장이라도 따려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 갖고 있는 재주는 세탁 기술이 전부다. 하숙집 딸 정윤(김혜나)은 취직을 못해 그냥 집에서 빈둥거린다. 정윤과 구상이 사귀고 있지만 하숙집 주인 내외 하씨(기주봉)와 봉순(김해숙)은 그 사실을 모른다. 이들 부부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딸 정윤이 하숙생 구상과 누워 있는 걸 본 뒤에야 여주인 봉순은 둘의 관계를 알아차린다. 정윤은 관계를 들킨 걸 기회삼아 구상과 결혼하겠다고 하고 허락도 얻는다. 그런데 정윤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오자 오래된 이야기의 상투성에 금이 간다.

둘은 사랑했는데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떠난다. 취직이 됐다는 통보를 받자 결혼을 약속했던 정윤은 구상을 버리고 미련없이 집을 나간다. 흘러간 옛이야기에서는 남자의 도주가 구설수의 키워드였다. 하지만 <경축! 우리사랑>에서는 여자가 떠나고 남자가 남음으로써 새로운 구설수가 시작된다. 정윤이 버리고 간 구상, 그는 이 동네를 뜰 것인가 혹은 그녀를 찾아나설 것인가. 깊은 실의에 빠졌지만, 예상외로 그는 묵묵히 이 집의 하숙생으로 계속 머무른다. 이때 구설수의 초점이 여주인 봉순과 그 하숙생 구상 사이로 옮겨진다. 딸이 떠나자 딸의 어머니 봉순이 하숙생을 사랑한다. 심지어는 그의 아이도 갖는다. 어때, 망측해? 꼭 그렇지는 않아. 감독 오점균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도리어 그런 게 신명나는 일이라고 상상한다. 온 동네가 이 집 이야기로 술렁거린다.

<경축! 우리사랑>의 가난한 마을 이화동

<경축! 우리사랑>은 능글맞기 짝이 없는 판타지의 영화다. 김기덕 영화에서 무서울 만큼 저돌적으로 집행되는 개념적 인물들간의 집착과 파괴라는 환상의 구조에 해학이라는 그물을 던진다면 어떨 것인가. <경축! 우리사랑>은 그 예시처럼 보인다. 일상생활의 상식에 기대어 김기덕의 인물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할 때(뉴스를 보다가 사형수를 찾아가는 <숨>의 여자가 상식적이지는 않다), 그건 오히려 김기덕 영화의 흥미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진전시켜가는 <경축! 우리사랑>을 보고 말이 안 된다고 할 때 그건 이 영화가 흥미롭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경축! 우리사랑>은 능글맞은 해학을 앞세워 막무가내로 슬금슬금 진전한다. 가난한 동네, 허름한 한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환상의 구조를 보면서 키득대다보면 시인 신경림이 부른 <가난한 사랑 노래>의 한 문장을 저절로 변주하여 흥얼거리게 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깊고 넓은 시인 신경림은 그렇게 말했다. 봉순의 늦은 사랑 노래를 접하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부르게 된다. 늙었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아니, 가난하다고 해서 환상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봉순이라는 50대 여성이 사랑을 찾는 과정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며 환상구조의 핵이라고 나는 지금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근 20살 나이차가 나는 여자와 남자가 사랑하게 되는 일이 희귀한 일이기는 해도 없는 일은 아니다. 그건 이 영화가 막무가내 환상력을 발휘하는 도화선이지만 환상의 강력한 진전은 거기에 있지 않다. 둘의 관계보다는 둘이서 힘을 합해 맺는 장소와의 관계에 더 능글맞은 환상성이 자리잡고 있다. 하씨는 아내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동네 부끄러워 구상을 쫓으려고 한다. 하씨와 호형호제하는 동네 남자들까지 나서서 “삼일 안에 동네를 뜨라”고 구상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그 때 구상은 “제가 말입니다. 봉순씨를 사랑합니다”라고 선언한다. 봉순에 대한 구상의 사랑이 실은 새로운 어머니를 얻는 것임을 또한 의미한다 해도(영화는 의식적으로 둘의 신체적 접촉을 보여주고 있지 않으며, 구상은 부모가 없는 고아로 설정돼 있다. 그가 부모를 가질 경우 이 환상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리는 봉순을 사랑한다는 구상에게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둘의 사랑을 인정하네, 그런데 그 사랑이 자네가 동네를 떠나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랑과 머무름은 왜 병행되어야 하는가. 구상이 봉순을 사랑한다면 그 둘은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수도 있다. 일터를 바꿔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게 여기 남아 지탄받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것인가. <경축! 우리사랑>을 환상구조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대목이다. 그들이 이곳에 머무르리라 결심하여 버티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일상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실재에 틈새가 벌어진다. 결국 한 지붕 아래 하씨와 봉순과 한때 구상을 사랑했던 딸 정윤과 봉순이 낳은 자식과 구상이 그냥 같이 산다.

그러니 이런 짐작이 가능하다. 구상이 사랑하는 건 정말 봉순 자체인가. 정확히 말해 구상은 봉순이 아니라, 봉순과 함께 이곳에 계속 사는 것을 진정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그점에서 구상이 떠나지 않기 위해 눙치는 이 마을의 존재가 실로 중요해진다. “나는 이 동네 정말 싫어. 오빠는 이 구질구질한 동네에서 만날 이렇게 다림질만 하고 살 거야?”라고 떠나가기 직전 정윤이 구상에게 물었을 때에도 구상은 “그게 왜?”라고 이상하다는 듯 반문한다. 거기에 주목할 때 봉순과 구상이 이 마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경축! 우리사랑>의 마을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거라는 걸 나는 영화를 보기 한참 전 이상한 경로로 직감했다. 부산영화제의 홍효숙 프로그래머가 <경축! 우리사랑>을 미리 보았다며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네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영화를 많이 촬영한다. <경축! 우리사랑> 외에도 ***의 **영화도, ***의 **영화도 여기에서 촬영했다.”(가독의 재미를 위해 나는 이 두 사람의 이름과 영화제목을 잠시 물음표로 놓으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먼저 본 두편의 영화를 떠올렸고, 여기에 무언가 흥미로운 실마리가 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아마 오점균과 나머지 두 감독은 서로의 영화에서 이 마을이 배경이 된다는 걸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왜 각자의 독창적인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또는 영화적 장소의 발견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서울의 기형적 발전사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혹은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더 있을 것이다(잦은 촬영에 지친 이 마을 주민들은 이제 영화 촬영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축! 우리사랑>도 주민들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고 관계자는 말한다).

그 점은 그러나 지금 나의 질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점균을 비롯한 나머지 두 감독이 영화적 장소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일정한 공유점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흥미롭다. 게다가 그들이 선택한 이 장소는 각자의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S자로 구부러진 비탈길, ㄷ자로 꺾인 육교, 한눈에 봐도 재개발을 기다리는 것 같은 불규칙하고 허름한 한옥들. 여기는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이다. 나는 세편의 영화가 이화동에 품은 장소에 대한 욕망이 궁금하다. 거기에 기필코 카메라를 댄다는 것은 무엇을 포착하고 싶었다는 뜻이었을까. 그리고 더 긴급한 점. 이 우연한 잡담에서 시작된 질문을 세편의 영화에 한정하지 않고 동세대의 주목해야 할 한국 영화감독들에게로 옮긴다면, 그들 각자의 영화 속 공간과 장소를 이해하는 문제와 연관한다면, 질문은 더 중요해진다. 임권택, 이창동, 이명세, 김기덕, 박찬욱, 허진호, 홍상수 등 그들의 공간과 장소는 어떠한가. 또는 이제 막 등장한 주요 신진 감독들의 공간과 장소는 어떠한가. 나는 그 질문 뒤에 이화동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질문하고 싶다. 한국영화에서 각자의 공간과 장소는 어떻게 이해되고 표현되고 있는가.

임권택의 풍경과 이창동의 캐릭터

한국영화의 스승 임권택은 자신의 공간과 장소에 관해 가장 오래도록 끈질기게 성찰하는 감독이다. 임권택 영화에는 늘 풍경(landscape)이 있다. 그의 풍경은 물론 거칠게 말해 둘로 나눌 수 있다. 공간으로서의 풍경과 장소로서의 풍경. 공간으로서의 풍경은 화폭 안에 담긴 한 예술가의 산수화로 끝내 그려지거나 한 명창의 소리로 불린다. 그 공간의 풍경은 늘 예술품이 된다. <천년학>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술가의 행위는 공간적 풍경을 기적처럼 재활시켜 위대한 예술품으로 완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장소의 풍경이란 그 같은 예술적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임권택 스스로 떠돌다 샅샅이 알게 된 남도땅 그 자체다. 둘 중 무엇이 됐건 거기에 삶(life)이 관여되어 있다는 게 임권택이 묘사하는 곳의 특징이다. 임권택의 그곳은 풍경이되 그 풍경은 삶이다. 삶은 다시 나뉘어 때로는 역사의 삶으로 때로는 개인의 삶으로 나아가지만 그때마다 계절과 산천의 풍경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임권택의 영화에서 풍경을 주시한다는 건 꽃놀이를 간다는 뜻이 아니라 결단코 공적, 개인적 삶의 얽힘을 본다는 뜻이 된다. 임권택의 풍경을 삶 자체라고 말하는 게 상투적이라고 반문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자문하자. 임권택을 제외하고 동시대 한국영화에서 영화 속 풍경을 지난한 삶의 문제 안에 포함시켜보는 시선이 또 있는가. 임권택의 다음 세대 중 배창호가 있지만 그의 영화를 볼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이명세는 일찍이 <개그맨>에서 피력한 길과 꿈, 두 가지 욕망 중 지금 꿈을 구현하는 데 욕심이 있다. 이명세는 장소보다 공간을 선호하고 자연적으로 놓인 공간보다 세트화된 공간을 추구한다. 이명세의 공간이란 세트(set)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명세는 풍경이 필요할 때에도 그걸 세트에서 창조한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풍경을 삶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그건 이창동의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이창동 영화의 지명들, 장소들 역시 삶의 반영은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창동이 스스로 영화의 장소를 삶으로 놓고 시작했을 수는 있다(<초록물고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일산의 풍경을 대변하는 버드나무의 그 미묘한 흔들림, 그 터, 그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꿈꾸는 가족들). 하지만 <밀양>을 보면 이창동의 장소는 삶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 그곳은 마침내 캐릭터(character)다. 거대한 인물이며 그 인물로서의 장소화다. 우리는 <밀양>에서 밀양의 삶을 본 것일까. 아니, 밀양에서의 삶을 ‘본 것’이 아니라 밀양으로 장소화된 하나의 인격체를 ‘대한 것’은 아니었나. 이창동은 밀양을 신중하고 신묘하게 캐릭터화한다. 이 말은 이창동이 삶을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삶을 대변하는 어떤 지명으로 밀양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마주하게 된 어떤 인격체처럼 구성했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신애(전도연)가 종찬(송강호)과 사랑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종찬은 이미 거대하게 캐릭터화된 밀양의 신체 일부일 뿐이다. 신애가 궁극적으로 대하는 건 캐릭터가 된 밀양이지 그 일부인 종찬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할 때, 양품점 주인은 밀양의 차갑지만 평범한 얼굴이고, 종찬은 밀양의 따듯한 심장이며, 웅변학원 선생은 물욕으로 물든 밀양의 몹쓸 손이다. 신애의 아이를 밀양의 그 몹쓸 손이 유괴한다. 거대 캐릭터로서의 밀양과 대적하고 선 여주인공 신애, 이 비대칭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것이 영화 <밀양>이다. 그녀는 거대한 밀양을 상대하다가 결국 힘에 겨워 종교에 의탁하여 미쳐가지 않았던가. 이창동의 영화에서, 특히 <밀양>에서, 그곳은 영화 속 주인공의 운명을 자동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의 주인이다.

허진호의 닫힌 지역성과 김기덕의 개념

줄곧 지방에서 영화를 완성하는 건 이창동이 아니라 허진호다. 하지만 이창동의 밀양과 허진호의 삼척(<봄날은 간다>) 혹은 양평(<행복>)은 지방이라도 같은 지방이 아니다. 허진호의 지방은 닫혀 있는 지역성(locality)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풍경이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연애를 보존하는 안전지대다. 허진호는 풍경이 아름다운 삼척에 가도 그걸 조감하지 않는다. 일부분만 내려다보거나 박물관에서 조감한다. 대신 이 지역 안에 인물들이 임시적으로 머무르는 상태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 지역 안에서만 보존될 수 있는 특별한 연애의 감정. 적어도 지금까지 허진호의 영화 속 그 애틋한 감정은 그 지역 안에 있을 때에만 대개 지켜진다. 심지어 인물들은 연애의 감정이 깨질까봐 서울로 들어오기를 겁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걸 어기고 허진호의 인물들 중 하나가 서울로 들어오면 그들은 다투거나 헤어지거나 파멸한다(<행복>).

허진호의 반대 경우가 있다면 김기덕이다. 김기덕은 자신의 공간과 장소를 선택하는 데 한계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건 김기덕만의 경제적인 영화 만들기의 방법과 관련있는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김기덕의 영화에서 지리적 특성보다 늘 영화의 추상적 개념이 먼저 앞선다는 점이 관건이다. 김기덕의 그곳은 더도 덜도 아닌 개념(concept)이다. 개념 아래서 그곳은 선정되거나 만들어진다. 예컨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물 위에 뜬 정자는 원래 거기 있었던 게 아니라 개념의 반영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덕의 그곳에 대한 생각은 불가피하게 인물들의 연기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인물들의 연기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연기가 점점 더 행위예술가의 무엇에 근접해가는 느낌이다. 행위예술가들에게 장소란 특별한 의미가 없다. 행위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건 개념이며, 그들이 개념을 표현할 자신의 신체와 그 신체를 움직일 얼마간의 공간만 있으면 될 것이다. 그곳이 도심이건 시골이건 상관없는 법이다. 김기덕에게는 허진호처럼 지켜야 할 연애의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깨우쳐야 할 추상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박찬욱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를 두고 <씨네21>이 그에게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딱 잘라서 말하기를 “그보다는 연극적인 공간에 매료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박찬욱은 갈수록 자기의 그곳을 무대(stage)로 여긴다. 때문에 박찬욱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대개 특정하게 꾸며진 무대 위에서 벌어진다. 연극의 편평한 무대 위에 올라선다는 의미보다는 무대 위의 상연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장소를 선택하거나 그런 세트를 설치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잔혹한 피의 심판이 가해지는 <친절한 금자씨>의 학교라는 무대. 용서와 구원을 비는 골목길이라는 무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도 일면 뮤지컬의 느낌을 주었다. 박찬욱 역시 뮤지컬의 느낌을 배제하지 않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뮤지컬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그들이 서 있는 무대와 인물들의 결연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개인무와 군무, 그건 정신병동이라는 이 무대에서만 가능하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물질이 맞닿는 홍상수의 장소

홍상수의 장소에 관해서라면, 마침 지난 전영객잔에서 정성일이 지적했으니 여지를 얻어 조금 더 길게 첨언하고 싶다. 그는 홍상수가 “장소의 인상을 다루는 매너”를 갖고 있다고 적확하게 말했다.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정성일의 지적은 홍상수를 지리적으로 포획하려는 노력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홍상수의 파리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물질이 맞닿아 새로 생긴 인상(impression)의 조합이다. 지리를 인상으로 포착한 자의 영화를 인식의 논리로 해석하면 배는 늘 산으로 간다. 즉, 홍상수의 파리는 무엇인가라고 누군가가 물으면 대답이 없다. 홍상수에게는 인사동 어느 술집의 술잔과 그날 새벽의 푸른 기운이 중요하지 종로3가를 지나 위치해 있는 인사동이라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지하철 역 입구를, 상점의 간판을 보여줄 때 그건 기호가 아니라 단지 인상의 흔적이다. 그 순간 찾아온 그곳에서의 인상을 직관과 감각으로 포착한 자의 영화를 지리적 인식론으로 해석하려고 든다면 당연히 실패할 만한 일이다.

정성일이 지적한 내용 중 <밤과 낮>이 세잔식 감각의 유물론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첨부할 수 있다. 홍상수가 인상을 포착한다면 그건 그 장소에 있는 물질의 인상이다. 물질의 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 모여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현재라는 완고한 시간이 된다. 그러나 나는 홍상수가 유물론에 근접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다. 홍상수가 장소를 채운 물질의 인상을 다루되 관념과 구체의 단단한 결합으로 다루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감각의 유물론이라는 말 대신 질료적 유물론이라고 불러볼 것이다. 그렇게 부를 때, 세잔의 질료적 유물론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펼쳐 보이는 건 홍상수가 아니라 스트로브-위예다. 그리고 스트로브-위예가 최후의 방어자가 되겠다고 했던 건 에릭 로메르다. 홍상수, 스트로브-위예, 에릭 로메르. 홍상수의 장소성을 말하기 위해 스트로브-위예와 에릭 로메르를 동원한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걸 풍성하게 설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홍상수는 갈수록 루이스 브뉘엘과 유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트로브-위예, 에릭 로메르의 어딘가에서 유사해지며 또 차이를 갖고 있다. 한때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를 비교하는 의견이 많았는데 홍상수의 최근작 <밤과 낮>과 에릭 로메르의 최근작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사랑>을 같이 놓고 생각하면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연애담이라는 서사를 넘어 물질에 대한 인상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로메르의 이 영화는 앙상한 이야기 말고 아무것도 없지만 기가 막힐 정도로 단단하다. 얼마나 단단한지 그것이 찢거나 분해할 수 없는 공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공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색무취한 물질성의 단단함, 거기에 대한 인상. 로메르는 <아스트레와 셀라동의 사랑>을 공기에 대한 인상으로 채운다. 홍상수의 영화처럼 여기에도 풍경은 없다.

풍경을 다루되 전격적인 유물론자의 입장으로 다루는 것은 말한 대로 스트로브-위예다. 물론 스트로브-위예가 유물론적으로 풍경을 다룰 때 그들은 홍상수나 로메르처럼 물질에 대한 인상을 역시 중요시한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차이는 그때 그것이 애매한 인상이 아니라 확고하고 정확한 단 하나의 인상이라는 점이다. 스트로브-위예의 영화에서 단 하나의 인상은 태고의 기억을 불러오는 역사의 응축이며 주술이다. 스트로브-위예의 영화에서 풍경은 길고도 반복적이다. 끝없이 바라보다 갑자기 돌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깨달음을 기다리는 행위다. 스트로브-위예의 영화에서 바라보는 행위란 기억을 내재한 대지를 보며 그들이 그토록 존경했던 세잔의 말 “이 산을 보라. 한때 그것은 불이었다”라는 외침을 부르짖는 행위다. 스트로브-위예는 바위가 태곳적 활화산으로 보일 때까지 시간을 끈다. 스트로브-위예가 지평선을 본다면 그건 지평선이 아니라 지평선의 기억, 땅을 본다면 땅이 아니라 땅속을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해온 것처럼 그건 영화의 지질학이지만 동시에 영화적 유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스트로브-위예는 말한 것처럼 단 하나의 정확한 언어를 찾는다. 즉, 그들의 풍경은 하나의 사물에 가장 정확한 하나의 언어라는 관계가 성립할 때 비로소 진실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영화의 일물일어설이다. 하나의 물질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정확한 영화 언어만이 존재하는 영화의 일물일어설을 스트로브-위예는 믿는 것 같다. 그걸 배운 게 페드로 코스타다.

결정적으로 홍상수는 물질의 인상을 포착하지만 영화의 일물일어설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중립적 표면”을 믿는다. 그게 홍상수의 장소에도 적용되지 않을 리 없다. 홍상수가 어딘가를 담을 때 세잔의 감각론을 따르기는 해도 한때 저 파리가 불타고 있었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물질성에 단 하나의 언어만 있을 수 있음을 그는 거절한다. 역사도 거절한다. 홍상수의 장소에 대한 인상은 그러므로 로메르의 공기처럼 단단하면서도 스트로브-위예의 풍경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대신 홍상수, 스트로브-위예, 로메르가 공유하는 점이 있다면 유물론을 넘어 시네마토그래픽한 감각의 실천이다. 때문에 이 셋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숏의 위계가 없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시네마토그래피란 영화사에서 세잔을 따른 위대한 영화작가들 일부만이 깨달은 비밀이다. 세잔이 회화에서 이룩한 감각론을 영화적으로 실천하고 번역해낸다면 그걸 시네마토그래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다르의 시네마가 아니라 스트로브-위예의 시네마토그래피. 내 식대로 말할 때 시네마토그래피란 의미가 중지된 상태에서 오로지 인상과 형상에 대한 지각만으로 세상의 실체를 벗겨낼 수 있다고 믿는 촬영술이다. 먼 길을 돌아 확인해보니 내게 홍상수의 장소란 마침내 시네마토그래피(cinematograph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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