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진척이 없다라고 느낀 30대 초반의 시나리오작가 저스틴 잭햄은 어느 오후, 책상에 앉아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혹은 해야 할 리스트(버킷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리스트에는 며칠 동안 비우지 않아 방 안 가득 냄새를 피우는 쓰레기통을 처리하는 것에서부터 인생의 동반자가 될 여인을 만나는 것, 그리고 스튜디오에 시나리오를 파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몇년 뒤, 저스틴 잭햄의 ‘버킷 리스트’는 전부 현실이 되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맨>의 롭 라이너 감독은 죽음과 싸우는 두 캐릭터의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다루는 이 잔잔한 코미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70대의 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한다라는 컨셉에 스튜디오가 그다지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관계로 두 주인공이 방문하는 세계의 모습은 모두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처리되었다. 모건 프리먼이 한때 역사학자를 꿈꾸었지만, 자동차 수리공으로 그 꿈을 접어야 했던 카터 역을, 잭 니콜슨이 제멋대로인 억만장자 기업가인 에드워드 역을, <윌 앤 그레이스>의 ‘잭’으로 익숙한 얼굴인 숀 헤이즈가 에드워드의 명민한 비서 역을 맡았다.
12월8일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열린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하 <버킷 리스트>)의 정킷은 컨퍼런스와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의 개별 인터뷰로 이루어졌다. 컨퍼런스에는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 시나리오작가인 저스틴 잭햄과 감독 롭 라이너, 프로듀서를 맡은 앨런 그리즈먼, 닐 머론, 크랙 재던 그리고 <윌 앤 그레이스>의 ‘잭’으로 유명한 숀 헤이즈가 패널로 참여했다. 컨퍼런스에서 두 배우가 차지하는 무게는 확실히 다른 어떤 정킷과도 달랐다. 그들은 스타를 넘어서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컨퍼런스 내내 좌중에게 웃음을 안겨주었던 잭 니콜슨은 개별 인터뷰에서는 무척 자상했는데, 영화의 대사 하나하나, 장면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인용해내는 모습에서 그가 왜 스타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먼저 저스틴 잭햄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 잭 니콜슨은 스스로 대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로서 어떻게 받아들였나. =저스틴 잭햄: 친구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니 어떻게 저런 대사를 생각해냈냐는데 대부분이 다 잭의 머리에서 나온 거였다. 나로서는 거저먹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롭 라이너: 잭은 원래 작가로 시작했다. 프리 프로덕션 들어가기 이전부터 각 장면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배우이다. 이를테면 시간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 “smoke through a key hole”(열쇠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라고 말하는데,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그의 입에서 나오면 묘하게도 그 느낌이 전달된다.
-당신에게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가. =롭 라이너: <버킷 리스트>는 죽음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보는 내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영화이다. 재미있으면서도 슬픈 균형이 있다고 할까. 왜냐하면 실제 삶이란 게 그런 서로 다른 요소가 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이니까. 처음 저스틴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인생에 대한 뉘앙스가 깔려 있는 드문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캐릭터들은 둘 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유머를 지니고 있다. 그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나.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가 느껴져서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작가가 30대일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저스틴 잭햄: 내가 죽음을 앞둔 70대의 두 남자의 심리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많이 아프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에 영감을 많이 얻었다. 그때 할머니는 죽음이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었다.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과의 작업은 어떠했나. =롭 라이너: 위대한 두 배우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 테이크에 더이상 좋은 것이 나오기란 불가능할 것 같은 연기를 뽑아주는 배우들과 일한다고 생각해보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존재가 화면상에 드러나지 않게, 그래서 이들의 연기가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음악이 있되 관객이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내 몫이다.
-당신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내레이션 작업에 당신만의 비법이 있다면. =모건 프리먼: 글쎄, 특별한 비법 같은 것은 없다. 학교 다닐 때 발성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무척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 정도? 목소리 연기는 1970년대경 텔레비전 시리즈 <일렉트릭 컴퍼니>에서 많이 하게 되었다. 그때 늘 이어폰을 꽂고 내 목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연극 무대에 섰던 것도. 극장 안의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발성에 대한 기본을 배우는 곳은 역시 연극 무대만한 곳이 없으니까.
-<버킷 리스트>는 삶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영화다. 당신은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모건 프리먼: 그 생각이라는 것은 그날그날 매번 바뀐다. 글쎄, 삶은 우연한 사건이랄까. 여기 이 순간 내가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 스스로를 인식하기에 언제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 같고. 그렇지만 그 답을 스스로 내릴 수 없기에 ‘신’이라는 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고 있다. 죽음을 통해 한 삶이 정의되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나. =모건 프리먼: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가눌 수 없이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은가. =잭 니콜슨: 개인적으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안 믿는다. 다들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 다음 세대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삶을 연장하고 싶냐라는 부분이겠지. 아무튼 가장 하기 싫은 일이(죽음), 결국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 되니까.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잭 니콜슨: 무척 어려운 소재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가볍지 않으면서도 코믹하게 다루겠다라는 시도가 특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매력이었고.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잭 니콜슨: 여럿 있는데. 흠. 왜 에드워드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America’라고 한마디 내뱉는 장면이 있지 않나. 때로는 이렇게 한 단어만으로도 모든 감정이 정확하게 전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당신에게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잭 니콜슨: 웬만하면 리스트 만드는 일은 피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번 작품하면서 계속 이 질문을 받다보니 하나 든 생각이 바로 ‘마지막으로 멋진 로맨스를 해보는 것’이다.
-롭 라이너와는 작업은 어떠했나. =잭 니콜슨: 롭의 부모와 절친해서 롭이 꼬마일 때부터 지켜보았다. 캐릭터 배우였을 때나 감독일 때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언제나 예술가라는 점이라고 할까? 그는 남들과 의사소통하려고 하기를,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다분히 고전적이라고나 할까.
-배우로서 역에 접근하는 방식은 어떤가. =잭 니콜슨: 교과서적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는 것부터 시작한다. 철저하게 읽으면 그게 다 내 의식 아래에 자연스럽게 깔리니까. 그리고 모든 장면 하나하나를 내가 아는 모든 이제까지의 경험을 다 끄집어내 분석한다.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긴장감을 벗어던지고 자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럼 어느 순간 캐릭터의 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아시안 시네마에 관심이 있나. =잭 니콜슨: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시마 나기사의 팬이다. 특히 오시마. 그런데 막상 자국팬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근래에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몇몇 한국 작품을 보라고 해서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커피 하나에도 까다로운 취향을 보인다. 실제의 당신에게 독특한 버릇이 있다면. =잭 니콜슨: 다이어트 코크만 마신다. (웃음) 아, 언제나 내 재떨이는 늘 들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