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 진행한 ‘지금 미국영화’ 특집의 마무리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의 대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중심으로 전개한 이번 대담에서 나의 주의를 끈 것은 ‘역사성과 정치성의 귀환’이라는 표현이었다. 정성일은 “지금 미국영화의 특별하고 이상한 엔딩은 주목해볼 만한 하나의 시대적인 존재방식”이라는 운을 뗐고, 허문영은 “전세계적으로 도덕적 명분이 없는데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 그런데 미국 대중은 그 전쟁 책임자를 재선시켰고, 그렇게 기본적 상식이 붕괴된 시점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기 시작했을 때, 지금은 그들이 시장의 평가보다 중요하게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연스런 흐름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김소영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전시의 홈 시큐리티의 무용성”이 드러난다며 “홈 시큐리티 얘기를 하지만, 사실 그 홈 자체도 서브프라임으로 날아갔고, 그런저런 상황에서 짧은 시간 안에 이처럼 큰 인기를 얻는 흑인 대통령 후보가 있다는 사실도 굉장히 놀랍다. 말하자면 예측 불가능성의 엔딩인 것 같다. 바로 지금 미국사회가 그런 것 같다”며 미국영화와 미국 정치상황을 연결지었다. 정치와 영화가 일대일로 조응하는 관계는 전혀 아니지만 지금 미국영화를 이야기하는 데는 필요한 상상력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의 액션영화가 득세했던 레이건 시대와 지금 미국영화를 비교해봐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 말고도 이런 예는 많다. 젊은 시절 문화혁명을 경험했던 중국 5세대의 영화에서 정치적 문제를 배제할 수 없으며 ‘지하전영’이라 불리는 지금 중국의 독립영화감독들도 전 세대와 다른 정치적 경험과 각자의 미학과 만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등 최근 각광받는 루마니아영화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폭압적 역사를 빼고 논하기 힘들 것이다. 얼마간 피와 희생이 있던 자리라야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걸까.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도 권위주의 정권의 해체와 관련있어 보인다. 386세대 감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영화에 전에 없던 감성이 두드러져 보였고 해외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었다. 모든 것을 정치적 문제로 돌릴 순 없지만 이런 변화를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지금 미국영화’ 특집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지금 한국영화’를 생각해보니 암담하긴 한데 최근 정치 상황을 보니 희망(?)이 있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좌파에 뺏겼던 10년의 한을 설욕하겠다며 벌이는 새 정부의 행동들이 연일 아이러니한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으니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감독들이 전 세대와 또 다른 도발을 벌일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코드인사를 비판하던 이들이 코드에 맞지 않는 단체장들을 내쫓거나 왕따시키고, 제대로 수사하겠다고 만들어놓은 특검은 삼성에 면죄부를 주며, 대운하를 파겠다는 대통령은 비즈니스 프렌들리, 부자 프렌들리, 영어 프렌들리 하느라 매일 쇼킹한 발언을 내뱉는 충격의 뉴스 퍼레이드. 앞으로 경험할 정치적 격변이 분명 새로운 감성의 출현을 재촉할 것 같다. 언젠가 지금 한국영화 특집을 하면서 이명박 시대가 낳은 효과를 분석할 날도 오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