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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동안 길을 떠돈 집시의 삶의 깊이, <추방된 사람들> 外
ibuti 2008-03-21

<추방된 사람들>

<라초 드롬>

1993년, 칸영화제에 소개된 <라초 드롬>은 ‘월드 시네마’를 새롭게 정의하며(<라초 드롬>을 그해의 영화로 뽑은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이 영화엔 국적이 없다’고 했다) 평자들의 눈과 귀를 황홀하게 만들었고, 토니 가트리프는 예술영화계의 유명인사가 됐다. 집시에 대한 간략한 언급- 천년 전, 밝혀지지 않은 사연으로 인도 북부를 떠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떠돌았다. ‘지탄, 치간, 보헤미안, 집시’ 같은 명칭이 주어졌다- 으로 문을 여는 <라초 드롬>은 오해 속에 살아온 한 민족에 대한 사려 깊은 기록이다. 북인도의 라자스탄에서 시작해 이집트, 터키, 루마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서 멈추는 여정은 그 자체로 집시의 지형학을 그리고, 집시가 꾸리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모든 집시가 검은 머리와 피부를 가진 건 아니듯이 모든 집시가 방랑하며 사는 것도 아니다. 기나긴 여정이 집시의 변화무쌍함을 알려주는 것과 반대로, 그들의 노래와 춤과 소박한 문화는 그들에게 한결같았던 역사적 사실을 드러낸다. 모든 집시는 박해와 천대 아래 살아왔고 현재도 그렇다. 여왕 이사벨에서 히틀러, 프랑코, 차우셰스쿠로 이어지는 가해자의 이름이 지금은 은밀히 가려졌을 뿐이다. 집시들은 곧잘 ‘저주받은 내 별자리를 불태우고 싶다’고 노래하면서도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가트리프는 그 체념의 세계를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거나 감상으로 대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천년 동안 길을 떠돈 자의 삶의 깊이와 자세의 문제다. 기본적인 양식과 집기 외에는 필요로 하지 않으며 노동보다 노래와 춤으로 신, 자연, 인생, 사랑을 향유하는 집시의 삶은 소유와 집착, 생산과 소비로 지친 사람들에게 삶의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하늘이 그런 뜻으로 집시가 떠돌게 만든 건지 모른다. 가트리프 영화의 영원한 소재인 집시는 2004년 작품 <추방된 사람들>에도 등장한다.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추방된 사람들>은 파리의 두 남녀가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알제리로 떠난다는 이야기다. 둘은 길을 걷고, 기차와 배를 훔쳐 타고, 굶주린 배를 채우려 일용노동자로 일하면서 알제리에 도착하는데, 그 길에서 유럽으로 밀입국한 알제리 사람과 유랑하는 집시를 만난다. <추방된 사람들>은 어릴 적에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가트리프가 자기 정신의 기원을 찾는 여행임과 동시에 집을 떠나 길 위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다양한 존재들을 빌려 감독이 천착해온 ‘디아스포라의 기록’을 확장하는 작업이다. 연출된 다큐멘터리인 <라초 드롬> 이후 가트리프는 극영화의 형태로 집시의 드라마를 계속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그의 성공작인 <가초 딜로>의 변주에 가깝고, 평론가 조너선 롬니가 ‘좀더 자유로운 영화와 삶을 위한 선언이자 궁극의 로드무비’라고 평한 <라초 드롬>의 힘이 근작들에선 많이 퇴색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집시의 시간> 같은 영화가 집시의 이미지를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으로 규정하는 세상에서,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집시라는 존재를 사실적으로 접근하면서 ‘집시 시네마’라는 희귀한 영화를 구축해온 가트리프의 노력을 결코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라초 드롬>의 프랑스판 DVD가 절판된 지 오래인 가운데, 한국에서 뒤늦게 출시된 <추방된 사람들>의 DVD가 반갑다. 화질은 둘 다 준수하며, 가트리프 영화에서 대사보다 더 중요한 음악의 재현이 특히 뛰어나다. <라초 드롬>의 DVD에는 음성해설과 인터뷰, 포토갤러리 등이, <추방된 사람들>의 DVD엔 메이킹필름(23분), 예고편이 부록으로 제공된다. 메이킹필름에선 연출과 각본, 제작에 더해 음악의 작곡과 녹음에까지 참여한 가트리프의 열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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