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아니 어쩌면 1997년. 나는 건축과 학생이었다. 학교에는 충실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주요 관심사는 건축 혹은 도시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많이 어설펐어도 열정은 있었던 것 같다(하긴 지금도 어설픈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 이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La Cite Des Enfants Perdus)를 봤다.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에 ‘도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없이도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화의 포스터에는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찾아갔던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프랑스 바스노르망디주 망슈현에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편집자)의 이미지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철제 섬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십년이 넘게 흐른 지금, 이제는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이전 영화였던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들을 본 상태지만, 그 시절 영화를 날것으로 본 뒤 처음 받았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잡혀갔던 아이들을 찾아오는 정도의 내용만 기억이 날 뿐 디테일한 이야기들은 기억에 가물가물한 상태다. 다만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덕에 옛 영화의 이미지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영화 속에 펼쳐지는 상상력의 농도는 매혹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화면에 잡아내는 장소들의 모습이 좋았다. 공간감이 풍부한 좁고 복잡한 도시의 모습들.
그 얕은 기억을 되새기며, 2년 전쯤에 미국을 여행하다가 샀던, 여태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The City of The Lost Children>의 DVD를 다시 봤다. 서점을 지나며 우연히 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네?’하고 샀다가 프랑스어도, 영어도 부담스러워 막상 틀어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노트북 컴퓨터의 DVD 지역 변경 제한이 한번밖에 안 남아 있던 게 이유였을 수도 있다).
내용을 대충 알았기에 가능했을까?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화면만으로 다시 행복할 수 있었다. 미에뜨는 늙지도 않은 채 여전히 아름다웠고, 일곱명의 도미니끄 피뇽은 여전히 즐거웠다. 극단적인 캐릭터들과 과장된 상황들, 예측 불허의 연계적 사건들이 17인치 모니터를 통해 이어졌다. 베네치아와 파리와 런던을 뒤섞어놓은 듯한 도시에 대재앙이 한번 휩쓸고 간 것 같은 모습은 저곳을 한번 꼭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일전에 건축 잡지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본 적이 있었는데, 건축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꼽힌 것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였다. 새로운 건축(도시)을 꿈꾸는 이들이 암울한 분위기의 실패한 미래 도시의 모습에 열광하는 모습이 언뜻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그 설문 결과에는 나름대로 어떤 도시(건축)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건축가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블레이드 러너>에 담긴 도시의 모습보다는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영화에 담긴 공간감이 풍부한 몽환적인 배경에 더 호감이 간다. 낡은 재료와 좁은 골목길, 어지러운 계단과 도시의 운하 등이 담겨 있는 공간 말이다. 나는 아직도 조금은 덜 유치한 버전의 꿈과 모험이 가득한 환상의 나라 따위를 꿈꾸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