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럽다. 1986년 4월28일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면 당혹스럽다. 인터뷰를 행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흡사 죽은 자를 대신한 심문처럼 들려서 불편하고 또 당혹스럽다. 20여년 전에 대학생이었던 인물들이 급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대목 또한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낱낱이 듣고 싶어하는 카메라의 집요함 또한 당혹스럽다.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당혹스러운 다큐멘터리다.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민족생존 위협하는 핵무기를 철수하라!”를 외치며 분신한 이재호, 김세진 두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다큐멘터리이지만,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1980년대를 다루는 후일담의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노무현을 이야기해도, 이한열 열사를 말할 때도, 광주를 떠올릴 때도 똑같은 풍경들이 나온다. 뒤따라 항상 같은 음악들이 붙는다. 지겹다. 모든 과거를 신화로 그리는 건 싫다.” 김응수 감독은 사건에 대해서도, 정황에 대해서도, 그들이 왜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쇼아>를 참조했다”는 다큐는 당시 신림사거리에서 무엇을 보았던(혹은 보지 못했던) 이들의 인터뷰에만 의지하는데, 엄혹한 시절의 의연한 투쟁에 대한 묘사는 관심 밖이다. 당시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시너통을 들고 버스를 탔고, 그래서 냄새 때문에 시민들의 눈총을 샀다는 인물에게 감독은 이렇게 묻는다. “혹시 어렸을 때 버스를 탔는데 도시락 김치국물이 흘러서 부끄러웠던 적은 없나요?”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불러내고 회고하지 않는다. ‘그때 거기’에서 ‘지금 여기’를 추궁하고 심문한다. 불완전하고 심지어 앞뒤가 맞지 않는 기억들을 토하면서 인물들은 현기증을 호소한다. ‘그때 거기’ 앞에서 얼어붙고 뒤뚱거리는 ‘지금 여기’를 카메라는 못 본 척 넘어가지 않는다. 쑤시고 또 물어뜯는다. 건물을 제대로 찾지 못해 ‘동을 뜨는’ 두 선배를 제대로 ‘가드’하지 못한 누군가의 후회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시위대에 늦게 합류한 뒤 이미 검은 연기로 변해버린 주검을 확인했다는 누군가의 오열이,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짐을 동료에게 맡긴 뒤 얼마 뒤 고인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누군가의 회한이, 뒤늦게 흘러나온다.
전작 <천상고원>을 본 관객이라면 예상하겠지만, 감독 또한 후반부에 “치유를 위한” 고백성사의 자리에 나서는데, 그도 치부라도 되는 양 변명과 망각으로 눌러뒀던 덩어리진 죄책감을 게워낸다. 전지를 가장한 객관을 내세워 낯선 과거를 익숙하게 포장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