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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영웅을 위한 작가의 뚝심, <민병훈 작품집>
ibuti 2008-02-22

세상에는 영웅이 나오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보통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 감독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이웃을 주인공으로 삼는 민병훈은 분명 후자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의 영화는 보통 사람의 영화이면서 영웅의 영화다. 그의 연작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에는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세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 혹은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불안과 위기에 처한다. 가난한 시골 선생은 겉보기에 어수룩하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벌이 날다>), 허풍선이는 노름빚 때문에 시골로 도피하며(<괜찮아, 울지마>), 신학도는 믿음과 구원의 길에 확신이 서질 않는다(<포도나무를 베어라>). 적절한 교훈을 늘어놓으며 우화를 완성하거나 근심에 빠진 사람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데 만족하는 보통의 영화와 달리, 세 영화는 주인공들에게 기어코 작은 기적을 선사하는데, 그 선물이 그냥 주어지진 않는다. 민병훈은 일상의 인물들이 반영웅의 가파른 여정에 올라 내면으로부터 영웅적 존재를 자각하게 만든다. 일정 부분 종교적인 민병훈은 영화 안에 신과 자연의 섭리를 개입시키려 하나, 꼭 그런 고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인물들은 스스로 ‘위안’의 과정을 완수한다. 3부작의 시작인 <벌이 날다>는 전형적인 영웅담의 공식을 따른 소박한 이야기다. 선생은 권력을 쥔 인간의 오만 앞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려 하는데, 가족의 만류와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는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괜찮아, 울지마>는 추락한 영웅의 이야기다. 진실한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남자에게선 존엄성이 느껴지지 않지만, 그는 패배 직전에 가치있는 삶을 엿보고 부활의 끈을 부여잡는다. 영웅의 가혹한 시련을 다룬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한층 풍부한 인물과 여러 층위의 이야기로 미묘하고 은근한 맛을 더했다. 주인공은 종교적 공간과 바깥의 공간을 오가는 동안 각기 다른 모습의, 거울과 같은 존재들과 만난다. 풀리지 않는 의문과 머리를 옥죄는 불안의 끝에서 염원했던 빛을 본 그는 소명을 받아들인다. 3부작의 분위기가 뒤로 가면서 무거워지는 것과 반대로 희망의 시선이 더 강한 건 왜일까. 영웅은 바라보고 박수치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고난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 자신이다. 비록 그 여정이 실패로 뒤뚱거릴지라도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할 때 보통 사람은 영웅의 본질에 다가선다.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날뛰는 웃기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대하게 된 진짜 영웅의 이야기다. 그래서 공허함이라곤 찾기 힘든 기적과 희망과 위안의 이야기는 신화의 영역에 오른다. 민병훈이 10년에 걸쳐 완성한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이 DVD로 나왔다. 민병훈의 영화가 어려웠다면 그의 음성해설을 들어볼 것을 권한다. 영화 안에서 타협보다 자신과의 싸움을 선택했던 민병훈은 그의 영화가 관객과 만나기 힘든 현실에도 순순히 항복할 마음이 없다. 힘들수록 작품 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고, 관객과 만나게 해줄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그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한국을 넘나들며 진행된 작업과정은 물론 영화의 심장부에 이르는 이야기까지 정성을 다해 들려준다. 그 외에 작품집의 격에 맞춰 영화평론가와 나눈 대담 두편(51분, 38분)과 <괜찮아, 울지마>와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메이킹 필름(34분, 39분) 등 몇 가지 부록을 수록했다. 대다수 관객에게 민병훈은 여전히 낯선 감독이다. 이 젊은 거장에 대한 발견이 더 늦어지면 안 된다. DVD가 의미있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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