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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담은 창조자, 장 루슈 회고전
홍성남(평론가) 2008-02-20

2월21일부터 2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

<네 멋대로 해라>(1960)가 개봉되었을 때 뤽 물레 같은 비평가는 이 영화를 만든 장 뤽 고다르를 가리켜 ‘현재 프랑스의 장 루슈’라 불렀다. 아마도 이건 루슈에게서 고다르로 이어지는 어떤 영향 혹은 영감의 통로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쓴 표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경력 초창기의 고다르는 루슈의 영화에서 영화 만들기의 새로운 길을 보았었다. 고다르가 보기에 리얼리티와 픽션의 교묘한 접근을 초라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대담한 스타일로 포착하는 루슈의 영화는 영화적 잠재력의 실현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다른 동료들 그 누구보다 루슈에 열광의 시선을 보낸 건 고다르였다. 이 열광은 다음처럼 좀더 복합적인 의미를 품은 단순한 표현 속에 담겨 있기도 했다. 루슈의 명함에 ‘인류박물관 보조 연구원’이라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고다르는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화감독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정의가 있을까?”

영화감독, 인류학자이자 시인

고다르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루슈는 무엇보다도 누벨 바그로의 길을 앞서서 보여준 인물, 영화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터준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오해를 낳기 쉬운 것이, 루슈를 단지 영화의 영역 안에서만 활동한 시네아스트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루슈에 대한 언급에서는 그가 영화감독이었으면서도 중요하게는 인류학자였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상학자이면서 많은 문학작품의 작가이기도 했던 아버지를 따라 루슈 역시 과학자이면서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이란 루슈의 과학자적인 측면과 영화감독의 측면이 서로 긴장하고 또 협력해서 나온 산물이었다. 2월21일부터 2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장 루슈 회고전에선 <신들린 제사장들> <엄마 물> <활로 사자잡기> <미국이라는 이름의 사자> <투루와 비티> 등 13편의 상영작을 통해 그의 영화세계를 다채롭게 조망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과학과 예술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루슈였지만 아무래도 그의 경력의 본격적인 출발은 문화기술(記述)자(ethnographer) 혹은 인류학자로서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인류학자는 2차대전 이전에 이미 아프리카에 매혹된 이후로 그 주술에서 평생 풀려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어떤 땅에 당도하면 그 땅이 사람을 바꾸지 사람이 땅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라는 <재규어>(1971) 속 대사는 루슈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시네아스트로서 루슈의 여정 역시 아프리카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후에 루슈는 동료들과 함께 아프리카로의 원정을 떠나면서 연구의 보조도구로 16mm 카메라를 가져갔다. 그러나 당시에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슈가 학창 시절 존경하던 공학 교수는 ‘우선 다리를 그려보고 나중에 계산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던 루슈는 그것을 자신의 영화 만들기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우선 영화를 찍고서 완성은 나중에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를 직접 손에 들고서 상황에 대처하며 자기만의 영화 만들기의 방식을 깨우쳐가기 시작했다.

<나, 흑인>

<활로 사자 잡기>

루슈의 필모그래피는 뒤에 100편이 넘는 영화들로 채워지게 되는데, 평자들은 그 안에서 전환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나, 흑인>(1958)을 꼽는다(물론 그 이전 작품들이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평가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부터 루슈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자리를 찾으러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잔에 온 니제르 젊은이들의 힘겨운 적응을 다룬 이 영화에서 루슈는 자신의 카메라 앞에서 출연자들이 에드워드 G. 로빈슨, 에디 콩스탄틴, 도로시 라무르 등이라 불리는 인물들을 연기하게 했고 스토리를 만들어내게 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출연자들에게 동시 녹음이 되지 않은 필름을 보여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이미지 위에 즉흥적인 보이스 오버를 만들어내도록 했다. 루슈는 진실은 여느 다큐멘터리처럼 그저 외면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기하는 자신과 원래 존재인 자신, 리얼리티와 픽션, 카메라 앞에 선 사람과 카메라를 든 사람 사이에 생성되는 다양한 만남의 층들에서 포착된다고 보았다. 이때 카메라의 역할은, 영화평론가 장 앙드레 피시가 이야기하듯이, 기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것 없이는 일어나지 않을 상황과 갈등을 선동하고 자극하는 기제가 된다. 이와 유사한 루슈의 카메라 개념은 좀더 명백한 다큐멘터리에 속하는 <어떤 여름의 기록>(1960)에서도 이어진다. 루슈가 저명한 사회학자인 에드거 모랭과 함께 만든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파리에 사는 이상한 종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를테면 ‘다이렉트 시네마’ 유파에 속하는 영화감독들이 그러하듯이 마치 자신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카메라 뒤에 숨죽이고 서서 대상들을 바라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루슈가 생각하기에 카메라는 화면에서 삭제해야 할 도구가 아니라 그것조차도 세계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저 세계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모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카메라의 개입을 통해 실제 삶에서도 픽션의 층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루슈의 영화는 그렇게 구축되는 역동적인 삶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루슈는 하나의 영역과 다른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예컨대 그는 카메라가 그어놓은 상상의 선 뒤에 말없이 머물러 있으려 하는 유의 영화감독은 아니었다. 장 앙드레 피시의 표현에 따르면 루슈는 선을 넘어서 제의의 관찰자에서 제의의 창조자가 된 사람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꼭 지적해야 할 것은 그가 (어떤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의외로)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또 그것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루슈의 명백히 연출된 픽션영화 (장 두셰, 에릭 로메르, 장 뤽 고다르 등의 단편들이 한데 묶인 <파리 스케치> 가운데 하나인) <북역>(北驛, 1965)은 신비감이 사라진 결혼생활에 싫증난 여인이 자신과 모험의 길을 떠나자고 꼬드기는 남자를 만나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이 언급하는 ‘객관적 우연’의 모티브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들린 제사장들>(1955), <투루와 비티>(1971) 같은 영화들 역시 초현실주의에 공감하는 이로서 루슈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의 정확한 복제가 오히려 비현실성 혹은 현실의 붕괴를 보여주는 데 소용이 되는 기이한 상황과 만난다. 중간 지대에 속한 자로서 루슈의 위치와 그로 인한 매력이 또다시 드러나는 순간이다.

미지의 영화를 탐험하다

루슈는 자신의 영화에서 픽션과 다큐멘터리, 현실감과 초현실주의, 자발성과 조작, 그리고 영화와 과학 등의 사이에 놓인 경계를 무화하려 한다. 그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들이 카메라 앞에 선 이들과 그것을 잡은 이들 사이의 협력과 공모에 의한 창작이나 즉흥 연출 같은 방법들이다. 루슈가 인류학 필름처럼 보이는 픽션영화나 거짓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에나 거의 똑같이 이용한 이것들은 꽤 잘 알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촬영 전 출연할 사람들에게 대강의 위치만을 알려주고 연습해볼 뿐 그 장면에 대한 연습은 거의 하지 않았고 자연광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촬영에 돌입했다. 그리고는 종종 어떤 이들로부터는 과도하게 나태하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출연자들의 즉흥성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물론 루슈는 마냥 게으르게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니었다. 카메라를 든 그는 자기를 흥분케 하는, 그래서 뛰어들 순간을 찾고 있었다. 그가 같은 장면에 대해 두 번째 테이크를 찍기를 거부한 것은 그것에는 원래의 것에 담겨 있었을 흥분감과 집중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루슈는 돌이킬 수 없는 모험을 하듯이 영화 찍는 일에 임했던 것이다.

루슈의 경력을 요약할 수 있는 단어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인데, 그 가운데에서 유용한 것이 아마도 ‘모험’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모험이란 대개 견고한 일상사로부터 벗어나서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한편 어쩌면 다른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건 (인류학자이면서 영화감독인) 루슈에게 고스란히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고루한 사고 체계를 가진 영토로부터의 월경(越境)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그 발걸음의 지도를 만들어냈다. 루슈는 지가 베르토프를 인용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의 주요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고다르, 이드리사 우에드라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 루슈의 영향을 받은 많은 후배 감독들을 보면 루슈가 걸었던 모험의 여정이 비옥한 영토에 다다랐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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