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해볼 만한 연휴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이 1월 내내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반등 분위기를 도모했다. 황정민, 전지현, 류승범 등 스타플레이어도 가세했다. 게다가 설날이 연휴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년 명절 연휴와 달리 관객이 차례를 지내고도 숨을 돌리고 극장을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한편에서는 우려도 있었다. 지난해 추석 연휴와 연말 시즌을 충격으로 보낸 극장가로서는 설날 연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있겠냐고 체념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연휴가 지나고 드러난 결과들은 단순히 명절 특수가 사라졌다는 것만 나타내지 않았다. 설 연휴 동안 극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더 게임>의 초반 강세
사실상 레이스는 1월31일부터였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더 게임> <명장> 등 설맞이 선수들이 모두 이날부터 뛰어들었다. 개봉 전 시사 이후 대부분의 영화 관계자들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황정민과 전지현, 두 A급 스타들이 출연한데다 <말아톤>으로 2005년 설 연휴를 평정한 정윤철 감독의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우생순>이 다른 영화들을 제치고 1위를 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설날 선수들 가운데 뚜렷한 화제작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를 타고 있던 <우생순>으로 관객이 몰리지 않겠냐는 분석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티켓파워가 강한 배우도 없고, 사전시사 결과 완성도와 재미 면에서 반응이 엇갈린 <더 게임>이 전국에서 48만1천명(배급사 집계)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2위는 <우생순>, 3위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이었고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4위였다. 하지만 <더 게임>을 제작·배급한 프라임엔터테인먼트쪽은 이 같은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눈치다.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안정준 배급팀장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 뇌를 바꾼다는 독특한 소재 면에서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내부에서도 결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일반시사를 통해 관객의 <더 게임>의 소재에 대한 호감을 확인했었다.” 실제 <더 게임>의 흥행을 예상했던 한 극장 관계자는 “지난 추석 시즌처럼 확실한 흥행주도작이 없는 상황에서 <더 게임>의 컨셉이 눈에 띌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또한 <더 게임>의 흥행을 두고 이제 스코어를 예측하는 패러다임 자체를 확실히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타배우와 스타감독이 더이상 티켓파워를 갖지 않는다는 분석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럼에도 스타의 존재감에 의존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더 게임>의 흥행을 두고 지난 2002년 추석 연휴를 평정한 <조폭마누라>를 연상하기도 한다. <조폭마누라>의 흥행 이후 조폭코미디의 전성시대가 열렸던 것처럼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독한’ 컨셉만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영화가 많아지지 않겠냐는 우려다.
지방관객 호응 높았던 <원스 어폰 어 타임>
<더 게임>이 개봉 첫주를 1위로 시작했지만, 사실상 설 연휴의 승자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이었다. 연휴가 끝난 2월11일 집계된 박스오피스에 따르면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연휴가 시작된 6일부터 9일까지 전국에서 58만5530명을 동원해 전국 누적관객 105만1534명(배급사 집계)을 기록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개봉 전 시사 뒤 설날 개봉작 가운데 가장 가볍게 볼 수 있을 영화로 평가받았다. 그동안 <조폭마누라>를 비롯해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같은 코미디 시리즈들이 주로 명절 연휴의 탄력을 받아 대박흥행을 이뤄낸 것을 본다면 이번 설날 연휴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비슷한 수혜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서울관객보다는 지방관객의 호응이 높은 작품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의 투자·홍보를 맡은 아이엠픽쳐스의 김민국 홍보팀장은 “평상시에 지방관객의 호응이 높다고 평가할 때는 서울 대 지방의 관객비율이 1:3 정도일 때”라며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연휴 동안에 1:3.5의 비율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게다가 <원스 어폰 어 타임>은 KTX 내 상영관에서도 명절 특수를 입었다. 1월31일 개봉과 함께 KTX에서도 동시상영된 <원스 어폰 어 타임>은 KTX에서만 2만여명의 관객을 추가로 동원했다. 물론 이 경우는 영화에 대한 선호도를 떠나 기차표를 구하려는 귀성객이 몰리면서 벌어진 현상이지만, 앞으로 명절의 KTX를 잡으려는 배급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예상케 하는 사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설 연휴의 실질적인 승자를 <우생순>으로 꼽는다. 1월10일 개봉한 작품이 2월10일자 박스오피스에서 2위를 기록했다는 건 다른 설날 개봉작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생순>에 밀렸다는 이야기다. 330여개를 지키고 있던 <우생순>의 스크린 수는 2월5일 280개로 감소했지만, 다시 연휴가 시작되면서 315개로 증가했다. 6일부터 10일까지 5일간의 연휴 동안 전국에서 동원한 관객은 총 66만6539명(배급사 집계). 현재(2월13일)까지 396만4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우생순>은 2월18일자 박스오피스에서는 전국 400만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박스오피스 1위도 120만명에 불과
“매진은 있어도 넘쳐나는 상영관은 없었다.” 설날이 지나고도 3일이라는 연휴가 있었을 정도로 여느 때보다 긴 연휴였다. 배급 관계자들은 평소에 비해 연휴 동안 약 53%의 관객이 증가했다고 분석한다. 명절 연휴에 영화를 보는 일이 더이상 비일비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아직 관객은 명절을 맞아 극장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스오피스 1위 영화의 스코어가 약 120만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번 설날 또한 끗발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CJ CGV의 이상규 홍보팀장은 “예전의 명절 박스오피스 1위였다면 연휴 기간 동안에만 200만명을 동원했을 것”이라며 “특별히 시장을 주도할 영화가 없는 이상 명절 특수는 더이상 기대하기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국 아이엠픽쳐스 홍보팀장 또한 “1위지만 기대보다 만족하기는 힘든 수준”이라고 말한다. 주도작이 없었다는 사실은 작품의 면면을 보지 않아도 개봉영화들의 스코어에서 나타났다. 2월11일자,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자료에 따르면, 1위인 <원스 어폰 어 타임>부터 4위인 <더 게임>까지 2월8일부터 11일까지 전국에서 동원한 관객 수는 4편의 영화가 모두 대략 45만명 안팎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처럼 4편의 영화가 관객을 나눠먹기할 정도로 영화가 많았던 걸까. 한 극장 관계자는 “한국영화가 간만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예년에 비해 많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극장가에 이번 연휴는 관객 수도 적었을뿐더러 시장주도작도 없는 배고픈 명절이었던 셈이다. CJ CGV 프로그램팀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번 설 연휴의 관객 수는 지난해 설 연휴(3일간만 비교시) 대비 16.3%가 감소했으며 지난해 추석의 5일 연휴와 비교했을 때는 2.9%의 관객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연 올 여름방학과 추석, 연말의 극장가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여느 해와 다름없이 2008년의 기대작은 있지만, 장밋빛 전망은 어디에도 없다. 우선 극장가는 오는 3, 4월 비수기를 넘기는 게 고비다. 더군다나 올해는 지난해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한국 영화계의 암울한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날 전망이다. 한 배급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2006년의 영화들이 넘어온 게 많았지만, 올해는 확실히 작품 공급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날을 막 스쳐보낸 극장가는 이제 보릿고개를 걱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