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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웅] 조금씩 천천히 변하고 싶다
최하나 사진 이혜정 2008-01-15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엄태웅

그는 과묵했다, 는 어느새 엄태웅을 다룬 각종 매체의 인터뷰 기사에 가장 자주 출몰하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성큼 걸어와 인사를 건넬 듯 수더분한 인상과 달리 그는 내성적이며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엄태웅이 연기한 국가대표팀 코치 안승필은 기름진 낯으로 ‘선진국형 훈련 시스템’을 주창하며 독단과 오만을 앞세우는 인물이다. 영화의 주역인 여자 선수들에 비해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도 싶지만, 경기장 안팎의 드라마를 직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활> <마왕> 등 드라마 속 선굵은 역할로 ‘엄포스’라는 별명을 선사받은 엄태웅은, 최근에는 그 이름이 전하는 진중한 무게감을 잠시 덜어낸 듯하다. <내 사랑>의 프리허그 운동가로 얼굴 가득 서글서글한 미소를 품더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는 <가족의 탄생>에서 보여주었던 헐렁한 유머가 더욱 어울리는 남자로 돌아왔다. 배우부터 감독까지, 여자들로 가득했던 현장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수확했을까. 촬영현장에서 고독한 청일점의 동료가 되어주었다는 두툼한 DSLR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엄태웅은 틈날 때마다 셔터를 누르는 부산함 속에서도, 낮고 신중한 목소리로 질문에 응했다.

-사진 찍는 게 그렇게 재밌나. =영화 찍을 때도 이 카메라로 사진 많이 찍었다. 여배우들에 비해 나는 현장에서 여유가 많으니까, 시간 보내기에 좋더라. 그렇다고 따로 공부한 건 아니고, 스틸 기사 분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많이 배웠다. 아, 사실 난 배우가 아니라 스틸 기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웃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여자들이 주역인데다가 핸드볼 이야기인데, 어떻게 출연할 생각을 했나. =여자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맞지만, 분명히 내가 관심을 갖고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또 예전 임순례 감독님 영화들을 정말 재밌게 봤다. 그 다음은 뭐 당연히, 시나리오가 재밌었고.

-여자 캐릭터들의 포지션이 명확한 반면, 안승필이라는 역할은 좀 애매하다는 생각은 안 했나. =그런 생각은 안 했다. 영화의 드라마 중 하나는 한국의 훈련 시스템과 외국 선수들의 앞서가는 시스템 사이의 갈등에 대한 것이지 않나. 바로 그 부분을 만드는 것이 안승필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대표팀 코치라는 설정만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코믹한 캐릭터였다. =그게, 원래 시나리오에는 코믹하지 않았다. 일단 잘난 척하는 캐릭터, 자기밖에 모르고 독단적인 이미지가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 강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쪽에 초점을 맞추려 했는데, 감독님이 태웅씨 안에 있는 걸 편하게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다시 설정한 것이, <가족의 탄생>의 형철과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가 됐다. 처음으로 촬영한 것이 고등학교팀에 지고 위원장실에 불려가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딱 느낌을 잡았던 것 같다.

-엄태웅, 하면 떠오르는 ‘엄포스’라는 별명이 그렇지만 외모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남성적이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 <우리 생애…> 같은 느낌도 재미있다. 스스로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나. =엄포스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도 좋고, 또 <우리 생애…>의 이미지도 좋다. 그냥 어떤 역할을 했을 때 뭔가 하나씩 과하지 않게 변화를 주는 게 좋은 것 같다. 나는 고정된 느낌을 가져가기보다는 조금씩 변화하면서 재미를 주고 싶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아마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아닐까 싶은데, 여자들만 가득한 현장 분위기가 어땠나. =여자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사실 그게 성별로 딱딱 갈리는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남자배우들이 모여서 가질 수 있는 분위기와 재미가 있지만, <우리 생애…>의 경우엔 나, 소리씨, 정은씨, 지영씨가 전부 동갑이라 친구같이 지냈다. 다만, 여자배우들은 다 땀 흘리고 뛰는데 나는 한발 물러나서 지켜봐야 하는 역할이라, 혼자 심심했던 거지. 그래서 사진도 찍고. (웃음)

-육체적으로는 좀 편했겠다. =굉장히 편했다. 그래서 여자배우들이 더 대견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다들 열심히, 모든 걸 다 바쳐서 하는데 내가 피해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스크린으로 영화를 처음 본 게 언제인지. 보니 어떻던가. =기술시사 때였다. 배우들이 다 그렇듯이, 내가 나오는 장면을 아주 집중적으로 봤다. (웃음) 마지막에 승부 던지기 하는 장면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더라. 또 전체적으로 억지스럽지 않게 웃음이 나오는 부분들이 좋았다. 내 얼굴도 지금까지 했던 영화 중에 가장 잘생기게 나온 것 같다. (웃음)

-소재만 생각하면 아무래도 스포츠영화라는 느낌이 강한데, 실제 영화는 그렇지 않더라. =사실 관객이 지금까지 보았던 할리우드의 스포츠영화를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그게 주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고, 또 온 국민이 다 아쉬워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어떤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보다 훨씬 더 감동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스포츠영화다운 재미와 더불어 한국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아마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화 중 최고가 아닐까.

-드라마 <부활> 이후 사람들이 엄태웅이라는 이름에 거는 기대감이 커졌다. 스스로도 그 부분을 의식하고 있을 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역할의 비중이 커지고 돈도 더 많이 받고 하면서 좀 무거운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게 나에게는 좋은 거고. 복에 겨운 고민이다. (웃음)

-<내 사랑> <우리 생애…> 최근 출연한 두 영화에서 모두 주인공이 아닌 보조 역할을 맡았다. =뭐, 비중있는 조연이다. 다 알고 출연을 한 거고, 부담이 덜 되는 측면도 있고. 이러다가 정말로 내가 다 끌고가야 하는 작품이 온다면 그때는 또 그 역할을 나름대로 하면 된다. 아직 나에게 딱 맞는 시나리오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상황에 맞게 가는 거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언제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다고. =그거는 평생 갈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어떤 계기를 통해 극복되길 바라는데, 아직까지도 그러고, 계속 그렇게 살 것 같다. 경험이 쌓이면서 카메라 앞에서 좀더 편하고 자연스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일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닥치는 두려움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평생 연기를 하고 싶나.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서 로또 맞으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웃음) 그래도 가능하다면 조금씩 조금씩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능이 없다니. 대중의 평가에 비해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거 아닌가. =나는 그렇다. 좋은 평가야 물론 기쁘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휴, 잘 빠져나갔다, 하는 거다. (웃음) 지금까지 스스로 정말 시원하게 연기 잘했다,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나에게 연기는 살아가는 수단이지 내 모든 건 아니다. 연기를 잘해서 결국 이루고 싶은 건 행복한 가정이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결혼을 빨리 해야겠다. =2008년이면 내 나이가 35살이니, 당장 내일 결혼해도 이른 건 아니다. 너무 늦게 하고 싶지는 않다. 늙어서 애 낳으면 나는 애가 귀엽겠지만, 애는 괴롭잖아. (웃음) 인생에 다 때가 있는데, 때를 놓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몇 시간만 지나면 2008년인데, 신년 계획은 있나. =그런 건 없다. 그냥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생각만 한다. 이러다보면 금방 40살 되고, 50살 되겠지. 그냥… 한 10년쯤 뒤에는, 착한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좋은 배우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배우가 되건 간에 남에게 상처 안 주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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