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가 있다. 온 가족을 고급아파트에서 부양하면서 주일마다 미사를 드리고 명절마다 할렘의 빈민층에 기부하는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 그리고 마약쟁이 친구에 여색이 심하며 아이를 만날 기회마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이혼남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 전자는 1970년대 뉴욕의 마약계를 호령했고, 후자는 뉴욕 경찰 대부분이 연루됐던 마약사업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데 투신했다. 이윤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가족조차 믿지 않는 프랭크와 외모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청렴한 리치의 공통점은 단 하나, 직업의식이다. 흔한 편견을, 역시나 명백한 대조법으로 돌파하는 두 캐릭터의 매력적인 대비가 <아메리칸 갱스터>의 메인 재료라면, 베트남전과 흑인민권운동과 미국식 자본주의 등 들끓던 시대의 어둑한 초상은 최고급 향신료. 전통의 우아함을 강조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와 스타일과 화려함에 열광하는 신세대를 함께 만족시킬 메뉴다.
사실 이 방면의 대가는 차고 넘친다. 두편의 <대부>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가장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를 비아냥거린 프랜시스 코폴라가 있고, 전기물에 시대를 담기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은 아직도 굳건한 갱스터물의 전범이다.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다가 마지막 순간 조우하는 두 ‘남자’ 프로페셔널의 드라마? 이건 마이클 만이 <히트>를 통해 새롭게 전매특허를 낸 분야다.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로 일찌감치 대가의 경지에 이른 뒤, 어이없는 선택(<지 아이 제인> <킹덤 오브 헤븐> 등)과 건재를 보여준 재기작(<블랙 호크 다운> 등)을 오갔던 리들리 스콧에게는 아무래도 ‘밑지는’ 게임. 매력적인 실화가 6년간 할리우드를 방황한 끝에 공중분해되기 직전 연출을 결심한 그는 대가보다는 장인으로 남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무 한 그루마다 최선을 다하여 거대한 풍경화를 완성하는 일흔 노장의 노련함. <아메리칸 갱스터>는 고전영화의 미덕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믿음직스런 장르물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스콧의 필모그래피에서 배우의 연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중간 도매상을 없애고 최상급 헤로인을 직수입하는 발빠른 경영자 프랭크는 덴젤 워싱턴의 자로 잰 듯한 연기로 육신을 얻었다. 감자칩 샌드위치를 만찬 삼고 모든 여자와 놀아나는 망나니 형사 리치는 조연에 머무를 법하지만, 본인의 사생활과 기묘하게 오버랩되는 크로의 본능적인 연기 덕분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무기를 쥔 배우들이 그처럼 빛날 수 있게된 메커니즘은 생각보다 정교하다. <뉴욕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서 출발한 스티븐 자일리언(<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의 시나리오는 개인과 시대와 장소가 맞물린 고리를 빠짐없이 움켜쥐는 한편 동전, 종이컵 등 사소한 소품 하나까지 잊지 않는다. 타이에서 베트남을 경유하여 미공군기와 마약제조공장을 거쳐 할렘의 실핏줄까지 흘러드는 헤로인의 유통과정을 묘사하는 몇번의 시퀀스는 어떤가. 미세한 고속촬영과 주밍, 정교한 프레이밍으로 70년대 초반 뉴욕의 뜨거운 정서를 쿨하게 담아낸 해리스 사비데스(<조디악> <라스트 데이즈>)의 촬영은 대중영화의 교본이다. 2시간40분의 러닝타임 끄트머리에 조우하는 프랭크와 리치의 서로 다른 세계를 냉정한 노란톤과 끈적이는 푸른톤으로 대비시킨 통제는 영화 전체의 톤을 결정짓는 촬영감독의 능력을 보여준다. 늘 흘러나오지만 절대로 넘치지 않는 그 시절 음악과, 시계소리까지 꼼꼼히 계산한 사운드 믹싱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교차편집은 거의 숙명이다. 프랭크의 검거와 관계된 두개의 수색을 교차시킨 스콧은, 마약제조공장을 습격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막상 (<블랙 호크 다운>에서 선보인 바 있는) 자신만의 직설법을 택한다. 영화에서 “가장 요란한 사람이 가장 약한 사람”이라며 동생의 옷차림을 꾸짖던 프랭크는 정작 자신의 요란한 옷 덕분에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제작진 모두는 그 문구를 신조로 삼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단 한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최선을 고민한 장인의 명품이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