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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시나리오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영진 2007-12-11

원작자와 저작권자(제작사)간 반복되는 권리 갈등… 제작사의 횡포인가, 원작자의 ‘생떼’인가

민병훈 감독의 <괜찮아, 울지마> 연출부로 일했던 이시호씨는 최근 제작사를 돌고 있다. 6년 전에 자신이 쓴 시나리오 <조선발명공작소>를 들고 “세일즈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시나리오 저작권의 양도가는 2억원 이상. A급 시나리오작가의 오리지널 저작물보다 곱절 이상의 가격을 부르면서 “시나리오를 사라”는 그가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씨네21>에 그간의 사정을 제보한 이씨 자신도 “내가 요즘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더욱이 이씨는 이 시나리오의 법적 저작권자가 아니다. 이씨가 쓴 시나리오가 맞지만, 저작권은 이미 양도된 상태다. 그런데 왜 그가 나서서 공연한 거래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이씨가 말하는 정황을 좀 살펴보자. 그는 지난 2년 동안 PMC프로덕션에서 <조선발명공작소>의 시나리오를 매만졌다. <조선발명공작소>를 다른 A 제작사에서 “1억여원을 주고 넘겨받았던” PMC프로덕션이 2005년 6월에 이씨에게 연출을 제안하면서부터다.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PMC프로덕션과 2천만원에 ‘오리지널 각본 계약’을 체결했다. 이씨는 감독 계약도 요구했지만, PMC쪽은 “회사를 믿어달라”며 미뤘다. 그렇게 2년여가 흘렀다. “수십번의 각색과 프리 프로덕션에 대한 작업의 보수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그는 올해 8월 말에 PMC가 영화사업부를 접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신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조선발명공작소>를 다른 제작사에 넘기기로 했다는 말을 바깥에서 들었다. 새로 프로젝트를 건네받은 제작사는 계약 전제 조건으로 “이씨와 PMC의 해당 프로듀서를 프로젝트에서 제외시켜달라”고 했고, “그동안의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PMC는 이를 구두로 약속했다.

제작사가 포기한 시나리오들은 어떻게 될까

현재 PMC는 이씨의 항의를 받고 프로젝트 양도를 중지한 상태다. 이씨는 이번 일이 “신인감독을 왕따시키려는 의도로밖에 안 보인다”고 말한다. 이씨는 “영화사업을 포기했으니 새로운 제작사를 직접 알아보기로” 했고, 이를 위해 PMC쪽에 저작권을 한시적으로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제작사쪽에서는 즉답을 회피했다고 한다. 그는 “계약서상으로 보면 저작권을 갖고 있는 것은 제작사이고, 현실적으로 그 제작사가 다른 제3자에게 그 권리를 양도할 수도 있다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저작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적어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돈 내고 저작권을 양도받았고, 이를 통해 내 것이 됐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건 지나친 횡포라는 것이다. 그는 “원금 회수에만 급급한” 제작사를 지적하며,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도 제작사가 이 프로젝트를 끌고 갈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씨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PMC 영화사업부 이천우 전 이사는 “이씨가 자신을 따돌리려고 했다고 하는데 신뢰가 없었으면 2년 내내 작업실 운영비 등을 지급했겠느냐”면서 “만족할 만한 시나리오를 내놓지 못한 것에 대해 이씨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금 제작사에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씨와 감독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제작비가 적지 않은 프로젝트다. 투자사들을 만나면서 신인감독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 모두들 우려를 표했다”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이씨에게 맡기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2년 동안 끌고 왔으나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 프로젝트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꼭 이씨가 연출해야 한다고 보진 않는다”면서 “이씨가 다른 파트너를 찾겠다고 나선 것을 용인한 것만 봐도 PMC가 저작권을 독점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불공정한 계약 관행의 악순환

“시나리오의 주인은 누구인가.” 곁에서 지켜보지 않은 이상 이러한 설전 앞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긴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분쟁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이유가 뭔지는 따져봐야 한다. 심산 시나리오작가조합 회장은 “잘못된 계약서임에도 여전히 관행에 따라 주고받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조선발명공작소>의 오리지널 각본 계약서는 저작권의 양수인이자 갑의 위치인 PMC프로덕션에 모든 저작권을 양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갑이 독점적인 권한을 갖는 계약서가 대부분”이라면서 “이 경우 나중에 문제가 발생해도 법적으로 을이 문제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을은 “촬영이 마무리될 때까지”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영화화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일반적으로 이 상황에서 을이 저작권을 되돌려받으려면 계약금과 그동안 투여된 제작비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영세한 제작사 입장에서도 ‘을’의 바람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 메이저 제작사에서 콘텐츠 개발 업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는 “이런 문제의 경우, 원저작권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해결 방법이 뚜렷하지 않다. 일부 이름있는 작가들의 경우 2차 판권을 요구하긴 하는데 이 또한 들어주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제작사는 투자를 받을 시에 모든 저작권을 투자·배급사에 이양하는 게 현실이다”라면서 “게다가 영화화되지 못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기획 개발비를 만회할 방법이 없으니 시나리오라도 품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설명한다. 2000년대 들어 프리 프로덕션이 중요해지고, 촬영 직전까지 시나리오 개발이 계속되는 형태로 프로덕션이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작권에 관한 논의는 관행에 의지하고 있고, 제작 환경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체 상황에서 갈등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 제고 필요해

“일정 기간 동안 영화화 권리를 넘겨받았다가 이를 실현하지 못했을 경우 다시 원저작자에게 이를 조건없이 되돌려줘야 한다는 권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를 관철할 만한 창작자가 많지 않다. 특히 신인작가, 신인감독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영화시나리오마켓을 맡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라하나씨는 “케이블의 경우, 제작 기간을 1년으로 정하는 등 변화가 있긴 하지만 영화쪽은 아직 더디다”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 제고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원저작자들이 영화화와 크게 상관없는 출판권 등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실적인 조건들을 무시하지 않되 관행으로 인해 배타적, 독점적 소유라는 개념만으로 굳어진 저작권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한국 영화산업에 주어진 또 다른 숙제다.

“잘못된 관행 때문에 아이템이 사장되는 게 문제다”

심산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공동대표 인터뷰

-시나리오 저작권에 관한 갈등이나 분쟁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케이스는 비일비재하다. 조합 차원에서 표준계약서를 제시했지만 그걸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고. 실제로 표준계약서가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다. 작가가 계약을 맺을 때 일정 금액을 받고 해당 제작사에 저작권 양도 계약을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작가로부터 넘겨받은 배타적인 권리가 일정기간 동안 영화화에만 한정된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내용조차 계약시에 명시되고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러한 관행을 바꿀 만한 여력도 없고. 사실 제대로 계약서를 쓴다면 영화화 하지 못할 경우에는 계약이 무효화되고, 저작권을 되받을 시에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간 돈을 내놓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불공정한 계약이라 하더라도 그걸 용인한 셈이니 작가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화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법에 호소할 수 없는 상황이다.

-2차 판권의 경우, 국내 작가들은 전혀 권리를 갖지 못한다. =할리우드에선 시나리오작가들이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발생한 수익들의 일부를 요구하고, 이에 대해 갑은 수익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하자 그럼 다 같이 굶어죽자고 파업을 결의한 것 아닌가. 현실적인 우리 상황을 고려해야겠지만 기본적인 건 해야 한다. 최근 몇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의 리메이크 시도가 있었고, 계약 과정에서 해프닝들이 있었다. 한국쪽에서는 제작사가 모든 권리를 갖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쪽에서는 끝까지 시나리오작가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동의를 받지 못하면 계약을 할 수 없다고 고집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다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나리오작가조합 차원에서 작가들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준비 중인 것이 있다면. =중요한 건 관행 때문에 묵인되고, 잘못된 계약서 때문에 갈등이 일고, 이 과정에서 아이템들이 사장되는 일이 잦아진다는 거다. 현재 조합 차원에서 법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한 불합리한 케이스들을 조사 중인데 내년 초쯤에 밝힐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