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스프레이>(2007)가 미국 개봉을 앞둔 지난 7월 초, 한 네티즌이 영화를 보이콧하고 나섰다. 보이콧을 주장한 인물은 케빈 나프. 워싱턴DC 및 볼티모어 지역의 게이 커뮤니티를 위한 온라인 뉴스사이트 <워싱턴 블레이드>(The Washington Blade)의 필자로 알려진 그는 <헤어스프레이>의 출연자인 존 트래볼타의 종교를 근거로 보이콧을 주장했다. 그는 존 트래볼타가 믿는 사이언톨로지교가 “대놓고 동성애 혐오증을 표방하는 종교”이고 트래볼타가 <헤어스프레이>의 호모섹슈얼리티적 성격을 “치유”하기 위한 워크숍을 후원했다더라는 루머를 덧붙였다. <헤어스프레이>의 감독 애덤 솅크먼은 이를 알고 벌컥 화를 냈다(솅크먼은 게이다). 그는 <LA타임스>에 말했다. “존 트래볼타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게이들과 친근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사이언톨로지든 뭐든 어떤 종교도 우리 현장에 들이밀지 않았다. 현장에 있는 모두가 즐거웠다(Everybody on the set was gay). 프로듀서들도 즐거웠고 작가들도 즐거웠고 작곡가도 즐거웠고 작사가도 즐거웠고 감독인 나도 즐거웠다. 안무팀 전체도 즐거웠다.”
케빈 나프란 인물이 예민해할 이유가 있긴 하다. 존 트래볼타가 <헤어스프레이>에서 맡은 중년주부 ‘에드나’는 쉽게 말해 드랙퀸 캐릭터다. 극중 설정은 여자이지만 ‘전통적으로’ 그녀를 표현하는 육체는 말할 수 없는 거구에 꺼림칙한 목소리와 기괴한 화장을 한 남장여자였다. 컬트감독 존 워터스의 1988년 동명 원작과 2002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버전 양쪽 모두에서 에드나는 트랜스젠더/복장도착자의 정체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고, 이 캐릭터의 아드레날린 가득한 퍼포먼스를 통해 극은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보낸다.
1988년 존 워터스에 의해 태어나, 2002년 브로드웨이로 가고
1962년 미국 소도시 볼티모어를 배경 삼은 워터스의 원작은, 동성애자 차별과 인권운동의 거센 충돌 시기를 거치고 나서도 그 혐오증을 벗지 못한 미국사회의 소심한 경직성을 조소하는 시선의 일부다. 사람이 닭과 섹스를 하거나 대변을 집어 먹는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워터스의 영화들 중에 굉장한 주류로 분류되는 <헤어스프레이>는 개봉 당시 주인공 트레이시가 아니라 그 소녀의 엄마인 에드나로 최고 화제를 모았다. 이를 연기한 ‘디바인’(본명 해리스 글렌 밀스테드)은 워터스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주연을 맡아 감독의 뒤틀린 취향을 대변한 컬트스타였고, 2002년 뮤지컬 오리지널 캐스트인 하비 피어스타인은 그런 캐릭터 배우의 개성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해 갈채를 받았다. 피어스타인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마저 밀면서 그로테스크한 드랙퀸 이미지 만들기에 몸을 던졌다. 마이너리티 취향으로 범벅이 된 이 캐릭터가 ‘사이언톨로지 교인’에 의해 리메이크된다고 하니, 게이 커뮤니티가 영화 개봉 전부터 지레 시비를 건 것도 일견 이해할 만한 것이다.
오, 오, 오, 내 머리를 좀 봐, 오늘 나의 스타일과 비교할 만한 게 있을까? 오, 오, 오, 헤어스프레이랑 라디오를 챙겼으니 난 어디든 갈 준비가 돼 있지. 길거리의 쥐들이 내 발 언저리를 돌며 춤추잖아. 마치 이런 말을 하려는 것처럼. 트레이시 너는 할 수 있어. 오, 오, 오, 나를 막지마, 오늘은 내 꿈이 이뤄질 거니까. -<Good Morning Baltimore> 중에서
케빈 나프의 보이콧 운동은 소소한 해프닝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헤어스프레이>는 상쾌한 아침, 뚱보 소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도대체 근거를 알 수 없는 희망과 꿈에 부풀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등교하는 모습으로 명쾌하게 시작한다. 커다란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춤추다 스쿨버스를 놓치고 만 우리의 깜찍한 주인공 트레이시(니키 블론스키)는 결국 청소차를 얻어 타고 가면서도 꼭대기에 올라앉아 두팔을 활짝 펼치며 “굿 모어~닝 보올~티모어~”를 노래한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다. 1962년 미국, 흑인 및 동성애자 차별과 인권운동이 충돌하던 시절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한 <헤어스프레이>는 “너무 즐겁고, 자연스러운 열정으로 가득 찬 영화”(<뉴욕타임스>)이며 “그냥 순전히 재미있는”(<시카고 선 타임스>) 영화다.
2007년 신나는 뮤지컬영화로 다시 태어나다
<헤어스프레이>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고생 트레이시의 ‘백조 되기’ 스토리이고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트레이시가 열광하는 <코니 콜린스 쇼>는 유행에 민감한 그 또래들을 겨냥해 매일같이 최신 춤과 음악을 선보이는 오락물. 쇼를 따라 머리 붕 띄우는 스타일 만들기와 춤추기밖에 모르던 트레이시는 그곳의 새 출연자 오디션에 무모하게 도전하고, 놀랍게도 선발된다. 심지어 출연자 중 최고 인기남 링크(잭 에프론)를 향한 짝사랑을 현실의 연애로 바꾸어내고야 만다. 트레이시는 <코니 콜린스 쇼>를 넘어서서 자기 삶의 진정한 스타가 된다.
제작사 뉴라인시네마가 <헤어스프레이> 리메이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컬트적 감성 충만한 존 워터스의 25년 전 영화 때문이 아니라, 듣기만 해도 기분이 행복해지는 음악으로 가득한 2002년의 뮤지컬 때문이었다. 무대연출가 잭 오브라이언, 안무가 제리 미첼, 작곡가 마크 샤이먼과 작사가 스콧 윗먼의 합작품은 이듬해 초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고, 뉴라인시네마는 마크 샤이먼과 스콧 윗먼으로부터 곡에 대한 판권을 사서 뮤지컬 영화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를 손에 넣은 <시카고>의 제작자 닐 머론과 크레이그 제이던이 2004년 제작사로 불려가 프로듀서 제안을 받았다. 이 둘은 뮤지컬 각본을 쓴 오도넬과 미한의 초고를 들고 에이전시들을 돌며 감독을 찾았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LA 할리우드,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까지 구석구석을 도는 동안 스필버그와 롭 마셜이 관심을 보였고 뮤지컬을 연출했던 잭 오브라이언도 잠시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뮤지컬 곡을 쓴 샤이먼과 윗먼의 20년지기 친구 애덤 솅크먼은 그 무렵 TV영화 한편을 연출했다. 그는 이미 뉴라인으로부터 감독 타이틀을 거절당한 상태였다.
어이 거기 예쁜 아가씨,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하는 아가씨. 여기 내가 물건을 좀 팔고 있거든요, 당신이 절대 교환하러 올 일 없는 물건. 어이 거기 예쁜 아가씨, 나 좀 선반에서 꺼내가 줘요. 당신 혼자 놀면 재미보기 어렵잖아요. -<Ladies’ Choice> 중에서
<브링 다운 더 하우스> <웨딩 플래너> 등을 연출한, 본인 표현에 의하면 “가족코미디 전문감독” 솅크먼은, 남들이 잘 몰라주었으나 본인은 한때 브로드웨이 스타를 꿈꾼 뮤지컬/뮤지컬영화 마니아였다. 열세살 때부터 수업을 빼먹고 몇 km씩 떨어진 극장에 가서 몰래 공연을 보곤 했다는 그는 고교 졸업 뒤 고향 LA를 떠나 춤을 배우겠다고 뉴욕 줄리어드에 들어갔다. 수년간 클래식 무용으로 실력을 다진 학생들 사이에서 나설 용기 한번 내지 못하고 솅크먼은 그곳을 중퇴했다. 그래도 그 경험이 바탕이 돼 미시간 주의 조그만 극장 무대에 섰고 이것이 계기가 돼 “150여편의 이상한 영화들”의 안무가로 참여했고 또 이것이 계기가 돼 폴라 압둘, 재닛 잭슨, 엔싱크 등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안무를 작업하고, 다시 그것들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할리우드에서 코미디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됐다.
솅크먼 감독이 직접 짠댄스 넘버로 리허설 지휘
토론토에서 프로듀서 닐 머론과 재회했을 때, 솅크먼은 이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트레이시는 바로 나다. 내가 바로 그 아웃사이더다. 언제나 내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던 인물 말이다.” 솅크먼은 존 워터스의 <헤어스프레이>가 개봉하던 해에 한 댄스바의 아르바이트생들로 만나 친구가 된 샤이먼과 윗먼이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히트를 치고 그것의 영화작업에도 참여하게 된 것을 더이상 배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다. 솅크먼은 영화의 안무까지 도맡기로 하고 주인공 트레이시 역을 위해 1100명을 오디션했다. 그중에서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콜드 스톤’(아이스크림 가게 체인점)의 아르바이트생 니키 블론스키를 찾아냈다. 전문 연기경험이 전무한 니키 블론스키는 말했다. “나는 내 자신이 바로 트레이시라고 생각해요. 겨우 17살이지만 큰 꿈을 가진 여자아이.”
당신은 정말 귀한 빈티지 와인 같은 존재죠,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할. 나한테도 조금만, 한 석잔쯤 확 부어줄래요, 우린 아직 죽지 않았어! 하고 건배를 해요! 나는 끝도 없이 먹고 당신은 머리가 자꾸 빠지네요, 어머 곧 다 없어지겠네. 그럼 가발을 써요, 나는 돼지고길 구울 테니, 아, 거기 노인강장제 좀 치워요! -<(You’re) Timeless To Me> 중에서
<미세스 다웃파이어>에 참여했던 작가 레슬리 딕슨은, 뮤지컬 각본가들이 초고 작업한 <헤어스프레이>를 꿈 많은 사람들의 삶의 찬가로서 최종 번역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그러한 긍정의 톤은 감독과 제작진이 판단하기에 <시카고> <드림걸스>와 같은 최신 뮤지컬영화의 스타일보다도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사운드 오브 뮤직>(1965) 같은 고전영화들의 스타일과 더 어울렸다. <헤어스프레이>가 뮤지컬 스코어를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시카고>나 <드림걸스>에서처럼 스토리와 분리된 별도의 판타지 시퀀스를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깃드는 쪽을 택하고 있다. 청춘들은 연인에게 달려가며 러브송을 부르고(<Without Love>), 뚱보 모녀는 손잡고 거리를 누비다가 자연스럽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것이다(<Welcome To The 60’s>). <헤어스프레이>에서는 삶이 곧 노래이며 노래가 곧 삶이다.
음악의 힘! 엉덩이가 들썩, 몸이 근질근질
마크 샤이먼과 스콧 윗먼이 쓴 <헤어스프레이>의 뮤지컬 넘버들은 영화가 이런 의도로 갈 수밖에 없도록 더없이 쉽고 대중적인 멜로디, 흥겨운 로큰롤과 솔 리듬, 온몸을 감싸안는 화려한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 유머와 감동이 어우러진 가사들로 이뤄졌다. 근래 몇년간 개봉한 다른 여러 뮤지컬영화들보다도 유독 <헤어스프레이>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들을 따라 절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가사를 모르기에 망정이지 안다면 극장에서 흥얼거릴 관객도 많을 터다. 이 광경이 아마도 미국 극장들에선 벌어졌을 것이다. 개봉 2주차부터 <헤어스프레이>의 미국 주요 상영관들 앞에는 노래 가사집이 구비돼 있어 영화를 보러 들어가는 관객이 하나씩 손에 쥘 수 있었다. 영화에서 노래가 나오면 펼쳐들고 따라 부르라는 의도였다. 깜깜한 극장 내부야 어떻든.
오, 오, 오, 오늘을 멈출 순 없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니까. 아이야 어제는 지나갔단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내일은 또 하나의 새로운 날. 그리고 흑백이 갈라졌었다는 것도 과거일 뿐이지. 예! -<You Can’t Stop The Beat> 중에서
확실히 2007년 <헤어스프레이>의 에드나 턴블래드는 존 워터스의 원작이 담고 있던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한 정치적 은유를 완전히 포기하다시피 했다. 이뿐 아니라 <헤어스프레이>는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계급적 갈등의 본질이나 그것의 해소에도 완벽히 무심하다. 이 영화의 모든 갈등 구조는 원작이 남긴 유산일 뿐이다. 솅크먼의 <헤어스프레이>가 정치적인 감성을 버리는 대신 선사하는 것은 구김살 없는 낙관론이다. 촬영감독 보얀 바젤리는 “트레이시의 희망 가득한 시선으로 보이는 1960년대 볼티모어”를 찾아 토론토 거리를 헌팅 다녔고, 작곡가 샤이먼과 작사가 휫먼은 감독의 주문에 따라 오직 영화만을 위한 흥겨운 새 뮤지컬 넘버들을 써내려갔다. 솅크먼은 스스로 짠 20개의 댄스 넘버로 전체 캐스트 및 150명의 댄서들을 두달간 리허설하고, 총 4달의 촬영기간을 잡고, 존 트래볼타에서 미셸 파이퍼, 제임스 마스덴, 크리스토퍼 워컨, 퀸 라티파, 아만다 바인스에 이르는 스타 캐스팅을 하기 위해 프로듀서들이 <시카고>를 생각하고 잡았던 4500만달러의 예산을 3천만달러나 넘겼다. 그 돈을 다 쏟아붓고도 뉴라인은 개봉 무렵에 이 영화가 2억달러를 벌어들일 거라고 장담했다.
1100:1 뚫고 뽑힌 주연배우의 순수한 얼굴도 한 몫
<헤어스프레이>는 7월20일 북미 3121개 극장에서 뮤지컬영화 치고 역대 최대 규모로 개봉해 첫주에 2748만달러를 벌어들였고(뮤지컬영화 최고 오프닝 성적), 10월25일까지 미국에서 1억1887만달러를, 전세계 1억9335만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록키 호러 픽처쇼>(1억1280만달러), <드림걸스>(1억300만달러)를 누르고 미 역사상 뮤지컬영화 3위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다.
<뉴욕포스트>의 루 루메닉은 <헤어스프레이>의 리뷰에 “최고로 오락적이며, 가장 오락적인 영화. 이번 세기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것 가운데 단연 최고로 즐거운 영화다. 맞다. 오스카를 수상한 <시카고>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라고 썼다. 과한 칭찬일 수도 있지만 <헤어스프레이>는 문자 그대로 온전히 즐겁다. 모든 현실적 판단과 태도를 마비시킬 정도로 즐겁다. 그것은 꿈의 프로젝트를 마침내 손에 넣은 감독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고, 모든 숏에서 사랑스러운 뮤지컬스타 꿈나무 니키 블론스키의 순수한 얼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쉼없이 이어지는 쉬운 러브송과 삶을 향한 찬가들이 가슴으로부터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헤어스프레이>는 모든 것이 꿈과 행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가올 날들에 대해 무한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랑스러움. 영화의 마지막 음악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당신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이 영화의 장밋빛 낙관론이 상영관을 나가는 순간 바래버릴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