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작마다 멜로 코드가 있는데, <싸움>의 김태희는 <열혈남아>의 심이영만큼이나 어린 연인 아닌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내 영화 전부 멜로 코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들 그렇게 안 본다. <오아시스>가 멜로영화 아니냐고 하면 ‘에이, 그건 좀’ 그러면서 말을 흐린다. 그만큼 진한 감정을 담아낸 멜로영화가 어디 있나. 특별히 상대가 어리다고 해서 달라지는 부분은 없다. 메이크업을 더 젊어 보이게 하는 것도 없고, 요즘에 나이 차 많이 나는 연인이나 부부도 흔하지 않나.
-<열혈남아> <그놈 목소리> 등 최근 무거운 감정의 영화들을 많이 했다. <싸움>으로 그 무게를 덜어보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나. =물론. <열혈남아> <그놈 목소리>를 연달아 하면서 짓눌린 게 있었다. 특히 <그놈 목소리>는 정말 힘들었다. 보통 나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찌고 시작하거나 빼고 시작하는데 촬영하면서 그냥 10kg이 빠졌다. 아이 잃은 부모가 무슨 밥맛이 있겠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촬영 중에 실제로 밥도 안 먹었다. 당사자의 상태로 맞추느라 촬영 내내 너무 힘들었다. 밤 꼬박 새고 한강 뛰어다니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현장 가서, 메이크업해주는 언니가 ‘왜 이렇게 하루 만에 늙었어요?’ 그러면 속으로 ‘아싸! 오케이’ 했으니까. 아마 다음으로 또 무거운 영화가 왔다면 분명 거절했을 거다.
-근래 출연작들 중에서는 <사랑을 놓치다>를 정통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싸움>과 비교하면 그 속도감이 확연히 다르다. =정말 다르다. 한지승 감독님이 연출했던 TV드라마 <연애시대>와 비교해도 그렇다. <연애시대>보다 세다거나 그 연장선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일단 굉장히 컷 수가 많다. 장면 하나하나가 꽉 짜여져 있고. 잔을 집어들고 돌리고 하는 것도 다 컷을 나눴다. 그래서 굉장히 속도감이 있을 것 같다.
-한지승 감독 하면 이른바 ‘멜로 전문’ 감독인데 호흡은 어땠나. =한지승 감독님이야 뭐 한양대 선배시고, 처음 입학했을 때 과대표여서 교탁에 서 계셨던 분이다. 오히려 <싸움>에는 멜로 코드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초반에 어떻게 만났는지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지만 ‘이랬던 그들이’ 하면서 ‘짠’ 하고 바뀌는 거라 느낌이 좀 다르다. 이번 영화 하면서 한지승 감독님과는 정말 안 맞았다. (웃음) 그래서 투정도 많이 부렸다. 이번 스타일이 배우를 가둬둔다는 느낌이 들어서 때론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굉장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감정을 빌드업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최근에 찍은 영화들 중 가장 컷이 많이 나눠지는 영화라 늘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번은 감독님이 ‘어때?’ 그러기에 ‘짜증나요’ 그랬다. (웃음)
-그럼 개인적으로 어떤 전략으로 적응하려 했나. =준비없이 참여하는 배우다보니(웃음) 더 힘들었는데, 과거에도 어떤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참여했던 건 <오아시스>가 유일했다. ‘홍종두(설경구) 뒤통수 바라보기’라고 계속 생각했었으니까. <싸움>은 중반 접어들면서는 지금 내가 찍고 있는 걸 만화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고 접근했다. 만화를 실사로 찍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내지르고 다소 오버하기도 하면서 움직임을 편하게 가져갔다.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다.
-배우가 그렇게 준비를 안 해도 되나. (웃음)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게 <박하사탕>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인데 이창동, 박흥식 감독님 모두 다 ‘시나리오 안 보고 오기’를 주문하는 분들이다. 집에서 먼저 거울 보고 연습하는 거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학습된 게 지금까지 왔다. <공공의 적> 할 때는 강우석 감독님이 나를 가만히 부르더니 “나 4년 만에 영화 찍는 거거든. 근데 너 보니까 아무 준비도 안 해오는 거 같더라. 야, 나 좀 살려줘” 그러셨다. 그러다가 결국엔 내 스타일을 아셔서 “너 뭐 찍는지는 알지? 그럼 됐어” 그러셨다. (웃음)
-상대역으로 김태희가 결정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전혀 친분이 없는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건데, 그게 사랑이 막 시작되는 멜로영화가 아니라 서로 지겨워서 이제 거의 끝까지 가버린 연인으로 나오니까 무척 궁금하다. =선입견으로 보면 정말 부조화다. (웃음) 주변 사람들이 ‘김태희 잘하고 있어?’ 그러면 ‘그런 생각할 시간 있으면 시나리오 한줄이라도 더 봐. 신경 꺼’ 그랬다. 난 상대역이 누구냐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다. 배우라면 상대 배우보다 감독과의 호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우보다 변덕이 더 심한 게 감독인데 그 어떤 배우도 감독보다는 호흡 맞추기가 쉽다. 그리고 난 내가 선배랍시고 뭘 가르치고 이끌고 하는 거 잘 못한다. 내가 뭘 해결해줄 것처럼 해놓고 못해주면 그게 더 문제다. 그냥 박수쳐주고 잘했다고 말해주는 게 제일 큰 도움이 된다. 어차피 연기는 기술이라기보다 자신감이다. 무언가에 위축되고 신경을 쓰게 되면 잘 안 풀린다. <싸움>은 철저히 ‘김태희 망가트리기’, ‘김태희 편하게 해주기’라는 작전으로 나갔다.
-다음 작품 <강철중: 공공의 적 1-1>도 큰 기대가 된다. =이번에는 진짜 준비 좀 해보려고 했는데(웃음) 7년 전의 캐릭터라 다 잊어버렸다. 가끔씩 케이블TV에서 <공공의 적> 나오는 거 보고 연습할 수도 없고. 그래서 강우석 감독님한테 크랭크인 시기를 늦춰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싸움> 개봉도 하고 그 기분 다 잊고 시작할 수 있게 말이다. 그 다음은 김태용 감독님과 작업하려 한다. <가족의 탄생>에서 정말 배우들이 다들 애드리브로 연기하는 것 같은 모습 보고 진짜 부러웠다. 뭔가 또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