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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루니] 신념 있는 섹시스타의 정치적 행보를 돌아보다 ①
박혜명 2007-12-04

올해 여름, 6월의 어느 오후 <LA타임스>의 한 기자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기자가 “여보세요”하니 전화기 너머에서 “난 조지 클루니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LA타임스> 6월19일자를 통해 보도된 이 기사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는 기자에게 “두 가지 주제를 갖고 논해봤으면 한다”며 수단 다르푸르 인종 학살과 민주당 상원의원 배럭 오바마에 대한 자기 견해를 쏟기 시작했다. 배럭 오바마는 현재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차기 미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흑인 정치가다. 유권자 참여를 바탕으로 ‘워싱턴식 정치’의 개혁을 역설하는 그는 클루니에겐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조지 클루니는 다르푸르 인종 청소의 비극에 관해 말했다. “이건 절대적으로 절박한 일이고 우리는 지금 당장 행동을 해야 한다. 이미 45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한단 말인가?”

조지 클루니가 <LA타임스>에 전화해 열변을 토할 그 당시, 극장가에는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돈 치들 등 그와 절친한 스타들이 포스터 속에 늘어서서 몇 천만달러짜리 도둑질에 관한 황망한 오락물 ‘오션과 그의 아이들’ 시리즈 3탄 <오션스 13>을 보라고 유혹 중이었다.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는 <오션스 13>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매우 매력적”(engaging)인 정도였다가 정치적 이슈가 나오자 “갑자기 불이 들어온 것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 떠들었다”. 차 안에서 전화를 받게 된 기자는 할리우드 대스타의 견해를 받아 적느라 수첩을 다 써버리고, 차 안에 굴러다니던 미 자동차관리국 등록서류를 들춰 그 뒷면에 허겁지겁 남은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야 했다.

할리우드의 가장 정열적인 활동가

알 만한 사람들은 알 테지만 현재 미국 할리우드에 조지 클루니만한 진보주의 ‘정치인’도 없다. 정치를 직접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치가 좌우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라는 뜻이다. 2003년 부시 정권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 이를 공공연히 문제 삼으면서 “15만명의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는 일이다. 그전에 물을 건 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가 보수적인 TV쇼 진행자들에게 “반역자”(traitor)로 몰렸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반역자로까지 몰린 뒤로 클루니의 정치적 행보는 더욱 다양해지고 활발해진 쪽에 가깝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떤 인과관계로 묶기 전에 객관적인 행보를 살피자. 우선 클루니는 ‘The One’ 대변으로 활동 중이다. 정식 명칭은 ‘THE ONE: The Campaign to Make Poverty History’. 이는 U2의 리더 보노와 붐타운 랫츠의 리더 밥 겔도프가 주축이 된 영국의 아프리카 빈민 구호 시민운동 ‘Make Poverty History’의 미국쪽 상대 캠페인이다. 클루니는 이들과 함께 2005 여름 영국 스코틀랜드 글레니글스 G8 정상회담 장소로 날아가 각국 대표들을 만나면서 아프리카 빈민 구호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호소했다. 같은 해에 그는 ‘탱고’라는 소형 전기 연료차를 구입했고, 테슬라 모터스에서 출시하는 전기 배터리 스포츠카 ‘테슬라 로드스터’의 구매자로 선입금을 마쳤다. 그는 이 차의 전세계 100명 한정 소유자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수단 다르푸르 학살 이슈는 최근 1~2년간 거의 모든 조지 클루니 인터뷰를 도배하고 있는 내용이다. 클루니가 이 사안을 처음 접한 건 2005년 말이다. 당시에 그는 이듬해 열릴 오스카에서 남우조연상 후보(<시리아나>)와 감독상 및 각본상 후보(<굿나잇 앤 굿럭>) 등 무려 세 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두 영화의 캠페인을 동시 진행 중이었다. 그는 “내가 원해서 만든 영화들이고 내 이름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행사에 참석해 아이들의 뺨에 키스해주고 영국영화아카데미(BAFTA)에도 인사하기 위해 런던까지 날아가는 식의 일을 하는 것에 기분이 몹시 찝찝한” 상태였다. 그때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쓴 다르푸르 관련 기사(퓰리처상 수상)를 접했다. 그는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안자마자 아버지 닉 클루니에게 전화해 함께 다르푸르에 갈 계획을 세웠다.

조지 클루니와 닉 클루니 부자, 그리고 두명의 지인이 합류한 4인의 민간인 그룹은 수단 남쪽에서 차드 국경을 통해 다르푸르에 도착했다. 소규모 군사쿠데타로 35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차드의 살벌한 국경을 지나 종교분쟁과 극심한 가뭄과 친정부 무장세력에 의해 살 터전을 잃은 수만명의 난민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물과 음식과 잘 곳 없이 떼지어 모여 있었다. 생명샘이 돼야 할 우물 속엔 난자당한 시체들이 빠져 있었고, 6살 먹은 여자아이가 조지 클루니의 셔츠를 붙잡고 물었다. “왜 고쳐주지 않아요?” 조지 클루니는 대답했다. “고쳐줄게. 너도 곧 괜찮아질 거야.”

에이즈 재단 AMFAR 행사에 참여한 모습

다르푸르의 참담한 현실을 카메라에 담아온 조지 클루니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연락해 출연을 요청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클루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응낙했다. 클루니는 30시간 동안 편집한 필름을 <오프라 윈프리 쇼>에 공개하고, 이어 <CNN>과 <NBC>의 <투데이 쇼>에도 필름을 들고 나갔다. <뉴욕타임스> <LA타임스> <타임스> <인디펜던트> <에스콰이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등 이후 클루니가 잡는 모든 인터뷰에는 다르푸르 사태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게 됐다. 클루니는 두 차례에 걸쳐 유엔 안보리를 찾았다. 동료배우 돈 치들과 2006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 금메달 수상자인 조이 칙, 케냐 출신 여성 마라톤선수 테글라 로루페 등과 함께 중국과 이집트를 방문해서 두 국가가 수단 정부와 유지하고 있는 외교적·경제적 관계를 이용해 다르푸르 지역의 학살을 중지시키는 데 도움을 달라고 호소했다. 클루니는 <오션스 13>의 가족(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돈 치들 등)을 모아 ‘Not On Our Watch’라는 기구를 만들어 다르푸르 난민 돕기 기금으로 1천만달러를 모았다. 물론 이 돈은 보노가 아프리카 에이즈 퇴치를 위해 5년간 모은 기금 150억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이긴 했다.

<오션스13>과 <마이클 클레이튼> 사이, 클루니의 전략적 선택

4년 전 미 보수주의자들이 그에게 붙였던 닉네임 ‘반역자’는 어쨌든 무색해져버렸다. 저주라도 하듯 그들은 “클루니의 커리어는 이제 끝장났다”고 덧붙였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되레 커리어 관리에서라면 조지 클루니는 할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감각의 소유자로 판명나고 말았다. 자신이 드라마 <ER>을 통해 <GQ> <보그> <피플>이 사랑하는 댄디하고 스타일리시한 섹시스타가 된 것을 잊지 않았던 클루니는 스타덤에 오른 뒤에도 1999년까지 <ER>에 안전한 발판을 둔 채 <피스메이커>(1997), <표적>(1998), <씬 레드 라인>(1998), <쓰리 킹즈>(1999),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2000) 등 장르와 소재와 정치적 태도가 다양한 영화들로 자신의 ‘무비스타’로서의 가치를 탐색했다. 2001년, 2천만달러의 개런티를 챙긴 <오션스 일레븐>으로 땅은 굳었다. “내가 원하는 영화를 하기 위해선 내 이름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질 만큼 유명세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가 원하지 않는 영화도 해야 하고, 남들이 나를 써주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시기가 있다.” 전세계 4억4400만달러 수입을 거둔 <오션스 일레븐>은 그 필수불가결한 시기의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2002년, “감독이 될 생각은 아니고, 그냥 한번 나도 시도해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짐짓 쿨한 이유를 대면서 클루니는 1970년대 방송인 척 배리스가 미디어의 허구와 현실을 흩뜨리며 쓴 기묘한 자서전을 소재로 연출 데뷔작 <컨페션>(2002)을 내놨다. 이 영화가 평단의 인정을 받고 나서 그는 1950년대 매카시 광풍에 맞서려고 했던 <CBS> 앵커 에드워드 머로에 관한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을 연출했다. 석유사업을 둘러싸고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얼룩진 중동-미국간의 무시무시한 뒷거래와 음모를 그린 현실정치극 <시리아나>(2005)에서 그는 최소한의 도덕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무력한 CIA 요원을 연기했다. 11월29일 개봉하는 <마이클 클레이튼>은 대형 법률회사의 비리와 글로벌 기업의 횡포에 관한 이야기다. 슈트 입은 변호사들이 등장하고 조지 클루니도 그중 하나이지만, 알아둘 것이 있다. 당장에라도 <GQ> 2008년 신년호 커버를 찍으러 떠날 것 같은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에 없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법으로 이익을 얻을 수 없는 사건들의 진실을 은폐하고 다니는 비도덕적인 변호사다. 그것으로 18년을 먹고살아온, 도박에 미쳤었고 빚더미에 앉은 마흔다섯살의 이혼남. 형이 그에게 말한다. “경찰들은 널 변호사로 알고, 변호사들은 널 경찰로 알아. 그런 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마이클 클레이튼>은 더이상 물러설 곳도 없는 남자가 자본주의의 부패한 권력과 그 권력 앞에 숨골이 눌리는 동료를 보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냉철하고 깊고 인간적인 통찰이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인사를 위한 Walter Cronkite상을 수상했을 때.

<시리아나>와 <마이클 클레이튼>이 안겨주는 소재의 현실성은 섬뜩할 정도로 르포적이다. 다소 윤기가 흐르긴 하지만 <굿나잇 앤 굿럭>에도 마찬가지 성격이 있다. 저예산이어도, 조지 클루니라는 톱스타 캐스팅이라고 보장돼 있어도, 정치적 이슈가 때에 따라서는 주요 셀링 포인트가 된 경우가 있었어도, 조지 클루니의 제작사인 섹션 에이트와 계약관계를 맺고 있는 워너는 매번 투자를 고사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흑백스릴러 <굿 저먼>까지 포함해 네편에 대해 모두 그랬다. 때문에 조지 클루니는 자신이 “의미있다고 믿는” 이들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자기 이름을 걸고, 개런티를 1달러만 받거나, <오션스 13>의 출연과 교환거래를 했다. 자기 취향대로 영화를 할 수 있는 스타가 됐을 때, 제작자 조지 클루니가 만드는 영화는 국가와 체제라는 거대 권력의 탐욕스럽고 치졸한 이면을 고발했고 배우 조지 클루니는 그 속에 황폐한 모습으로 들어가 앉아 텍스트의 일부가 됐다. 단정한 은발과 구김살없는 고급 맞춤양복 차림으로 각종 행사장에서 미소를 날리는 21세기의 캐리 그랜트는 스크린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와 오후 8시 뉴스 타임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일치시켜갔다. 그가 그려오던 미래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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