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윤성호의 영화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연애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인용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윤성호의 장편 데뷔작인 <은하해방전선>은 감독 윤성호가 말하는 ‘윤성호의 영화 혹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과 겹친다. 자신의 단편들에서 외부 텍스트를 끊임없이 인용하고 조립해왔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자신의 단편들을 인용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은 무언가를 내뱉는 순간, 내뱉어진 담론, 문장, 가치를 끊임없이 지운다. 말하자면 지움으로써 다른 차원으로 가볍게 이행한다. 그러니 이 의미심장해 보이는 제목은 사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은하’에게서 해방되고자 하는 어느 어수룩한 감독의 슬픔을 지칭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수룩함을 화려한 말발로 감추는 영재(임지규)는 장편 데뷔를 준비 중이다. 그는 바로 그 말발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은하(서영주)에게 실연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준비하던 영화는 난항을 거듭하고 그 스트레스로 영재는 급기야 실어증에 걸리고 만다. 그러나 실어증은 갖가지 묘기, 이를테면 복화술과 입에서 나오는 피리소리 등으로 대체되면서 자기기만적인 영재의 말들을 기의없는 음악으로 만든다. 영재의 실어증은 사랑도, 영화도, 글도 모두 입으로 하는,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두려움의 징후다. 혹은 소통과 사랑의 처절한 실패 앞에서 부서지기 전에 소심하게 한 걸음 뒤로 빼는 물러남이다. 그런 영재 앞에 은하가 아닌 새로운 사랑(이은성)이 나타난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며 영재는 자신의 말만 주야장천 내뱉기 전에 그녀의 눈과 입을 ‘들을 수’ 있어야 함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영화는 영재의 내면적 변화의 시간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이다. 그건 이 영화가 강박적으로 말의 의미나 정치, 거대담론을 불신하고 있다는 인상과도 연결된다. 때때로 영재가 소비하는 수많은 말과 감정은 이 냉정한 세상과 부딪치는 제스처가 아니라, 그 세상의 중심에 들어서지 못함에 대한 자괴감과 냉소의 제스처처럼 보인다. 또한 영화는 신자유주의, 제국주의, 영화, 사랑 등을 그 자체로는 텅 빈 기표로 반복 사용하며 무언가 남겨짐을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유보하고 있다. ‘담론을 패션(fashion)으로 만듦으로써 발언이 되게 하기’와 ‘담론을 또 하나의 매혹적인 상품으로 소비하고 말기’ 사이에서 이 재기발랄한 영화는 위태롭게 스스로를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