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율, 리듬, 음조, 배음. 에이젠슈테인이 사용한 몽타주 종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내 관심은 그가 어느 헝가리 영화이론가와 주고받은 논쟁에 가 있다. 갑자기 이 논쟁이 다시 생각난 것은, 피터 그리너웨이가 남기고 떠난 말 때문일 게다. “미래의 영화는 텍스트, 프레임, 배우, 카메라의 4대 폭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무슨 뜻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요즘 치르고 다니는 영화의 장례식이 디지털에 맞는 새로운 영상미학의 요청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은 있다.
배우에서 카메라로
다시 에이젠슈테인과 벨라 발라스의 논쟁으로 돌아가보자. 1925/26년에 발라스는 카메라맨에 관해 두편의 논문을 쓴다. 그가 카메라맨에 주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뉴미디어는 등장 초기엔 올드미디어를 따라가는 전략을 취한다. 그리하여 초기 사진이 회화를 닮으려 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초기에는 연극을 흉내내려 했다. 영화란 카메라로 연극을 촬영하는 행위라 믿었기에 최초의 극영화들에서 ‘커트’는 종종 무대 위에서 막이 내리는 것과 일치했다.
영화의 원리가 연극과 다르다는 인식이 생긴 뒤에도, 영화는 여전히 연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배우들의 연기로 이어가는 서사. 발라스의 글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이제 그는 영화란 ‘카메라 앞에서’가 아니라 ‘카메라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예술임을 강조한다. 회화가 모델이 아니라 붓질에서 나오듯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피사체가 아니라 대물렌즈다. 배우미학은 카메라미학으로 이행한다. 폭군 ‘배우’는 폐위되고, 카메라맨이 왕위를 계승한다.
발라스는 <전함 포템킨> 속의 두 장면을 예로 든다. 오데사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장면과 돛단배들이 질주하는 장면. 특히 수백개의 부풀려진 돛들이 바다로 미끄러지는 황홀한 장면은 “그 어떤 위대한 배우의 얼굴이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환호, 사랑, 축복, 희망을 표현한다”. “만약 이 두 장면을 주위 풍경이 다 나오도록 더 큰 프레임에 담았다면, 그 상징적-시적 효과는 사라졌을 것이다.” 이 두 장면의 뛰어난 시적 효과는 “피사체가 아니라 촬영(!)”을 통해 얻어졌다는 것이다.
가위를 잊었다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에이젠슈테인은 먼저 발라스가 자본주의적 타성에 빠져 배우 대신에 카메라맨을 ‘스타’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사실 배우의 역할을 먼저 없앤 것은 에이젠슈테인이었다. <전함 포템킨>의 특징은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데 있지 않은가. 거기서는 오데사의 시민 전체, 포템킨의 수병 전체가 주인공이 된다. 역사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맨이라고 이 신념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로써 또 한명의 폭군이 제거된다.
하지만 아직 더 중요한 논점이 남아 있다. 발라스는 영화의 미학이 렌즈로 담은 개개의 숏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전함 포템킨>의 두 장면을 인용하며 정작 가장 유명한 오데사계단 장면을 빼놓은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이 보기에 영화의 효과는 개별 숏(Einstellung)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들의 결합(Zusammenstellung)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몽타주야말로 영화의 모든 것이라는 얘기다. “벨라는 가위를 잊었다.”
개별 숏에서 미학을 찾는 것은 곧 영화를 조형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에서 해방된 영화가 다시 회화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생각하는 영화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의 상징학(Symbolik), 즉 영화 고유의 상징학을 조형적이며 서사적인 예술(회화와 연극) 속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를 연극의 무대는 물론이고 화가의 프레임에서마저 해방시킨다. 이로써 또 하나의 폭군이 제거되었다.
지성적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영화에 대한 이해는 지금 그것의 ‘두 번째 문학적 단계’로 들어섰다. 언어의 상징학에 접근하는 단계로 말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회화가 아니라 언어에 가깝다는 것이다. 퍼스를 빌려 말하자면, 영화의 기호적 성격은 도상(icon)이 아니라 상징(symbol)에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영화는 언어가, 즉 일종의 상형문자가 된다. 우리는 에이젠슈테인이 한때 일본어를 공부했음을 안다. 그때 한자의 구성원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입’(口)과 ‘새’(鳥)가 결합되면, ‘운다’(鳴)는 뜻이 된다. 이를 이용하면, 이미지를 통해 관객에게 사상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전함 포템킨>에도 이 상형문자가 등장한다. 세 마리의 석(石)사자를 연달아 보여줌으로써 인민대중의 깨어남을 상징하지 않았던가. 또 <파업>에서는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과 도살장에서 소를 잡는 모습을 병치함으로써 억압받는 대중의 처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당시에 러시아 인민의 다수는 아직 문맹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지성적 몽타주를 적용하여 만든 <10월>은 정작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대중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당연히 당으로부터 혹평을 들어야 했다. 발라스도 반격을 개시한다. 동사나 형용사처럼 활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아도, 이미지는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미지는 생각을 ‘의미’할 게 아니라, 생각을 ‘형상화’해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감독들은 종종 “상형문자 영화의 위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상형문자? 에이젠슈테인의 실험
지성적 몽타주는 에이젠슈테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직관적이지 못했다. 가령 <10월>에는 신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그리스정교의 신상(神像)에 이어 중국,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온갖 신들을 보여준다. 이로써 에이젠슈테인은 기독교의 유일신이 그저 수많은 신들 가운데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고 거꾸로 ‘기독교의 신이야말로 다른 모든 신들 속에도 들어 있는 보편적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각각 비결정성을 갖고 있다. 가령 ‘해리가 샐리를 만났다’는 텍스트는 아직 해리와 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반대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는 이미지는 그들의 이름이 해리와 샐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못한다. 발라스의 지적은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미지로 텍스트를 의미하려는 에이젠슈테인은 바벨의 언어로 아담의 언어를 흉내내는 것만큼이나 가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10월>에서 에이젠슈테인은 필름을 거꾸로 돌려 파괴된 조각들이 원래의 황제상으로 복원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물론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케렌스키 내각이 실은 왕정복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법은 영화를 일종의 리버스(rebus), 즉 그림 수수께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水+9+木=물구나무’. 얼마나 썰렁한가?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은 <10월>의 대중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화에 대단한 만족을 표하며 계속 상형문자 실험에 몰두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마지막 폭군
앞으로 돌아가보자. “영화에 대한 이해는 지금 그것의 ‘두 번째 문학적 단계’로 들어섰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번째’라는 말. 이는 그전에 또 다른 문학의 단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책으로 나왔다가 영화화되는 소설이든, 처음부터 영화화되기 위해 씌어진 시나리오든, 영화가 문학에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로써 마지막 폭군이 제거된다. 에이젠슈테인은 이미 오래전에 영화를 4대 폭군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물론 그 자신과 그의 영화미학은 또 다른 폭군, 스탈린이라는 <이반 대제>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지만.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윈도 창문의 아이콘처럼 오늘날 이미지와 텍스트는 하나가 되고 있다. 문맹 대중에게 의미를 그림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시대에는 해석의 다의성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원주의 시대에 지성적 몽타주의 해석적 모호함은 외려 미적 매력이 될 수 있다.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미지의 결합으로 상징을 만들어내는 그리너웨이가 어딘지 에이젠슈테인을 닮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