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잔혹하다. 특히나 그것이 스러져가는 탄광촌 광부의 삶이라면 더더욱. 사고를 당하고, 실직하고, 진폐증 진단을 받고, 집은 철거되고. 숨과 함께 들이마신 탄가루가 서서히 폐를 잠식하듯 지뢰처럼 매복한 절망들은 작은 출구조차 남겨놓지 않은 채 그를 집어삼킨다. <검은 땅의 소녀와>의 아버지, 최해곤의 절망을 마비된 듯한 체념의 얼굴로 그려낸 것은 연극판에서 뿌리가 깊은 배우, 조영진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영성이 충만한 낯빛으로 교화를 선언했던 <밀양>의 유괴범 박도섭을 기억한다면, 그의 얼굴이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시곗바늘을 돌려본다면 이발 의자에 누워 짧은 오수로 안식을 찾는 고독한 통치자(<효자동 이발사>)가 떠오를 것이다.
이윤택 사단 ‘연희단 거리패’의 일원으로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등을 수상했고, 스크린에서도 점차 영토를 넓혀가고 있지만 사실 조영진은 45년 인생 동안 순풍보다는 역풍을 더욱 자주 맞아왔다. 기술로 돈을 벌고자 했던 소년은 한순간 벼락처럼 연극에 사로잡혔고, 열정 하나로 사회에 뛰어든 뒤에는 배우, 학원장, 술집 사장을 전전하며 돈도 잃고 가정도 잃었다. <검은 땅의 소녀와>의 전수일 감독이 그에게 “너는 이미 최해곤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풍랑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는 걸까. 올해 1월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얼마 전 동아방송예술대학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으니 이제는 바람이 그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아내가 내일 인터뷰가 있으니 일찍 자야 한다며 자리에 눕히고 팩까지 붙여줬다”고 말하는 조영진의 얼굴에선 감출 수 없이 행복한 미소가 배어나왔다.
-<내 안에 부는 바람>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에 이어 <검은 땅의 소녀와>까지 전수일 감독의 작품에만 3번째 출연이다. 먼저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 들어야 할 것 같다. =같은 학교 선후배 관계다. 부산 경성대학을 나왔는데, 전수일 감독님이 1기고 내가 2기다. 친한 형 동생 같은 사이랄까. 사실 <내 안에 부는 바람>은 그냥 형이 하라고 해서 한 거다. (웃음)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원래 설경구씨가 맡은 역할이 이야기되다가 내가 역량이 부족하니까 설경구씨에게 가고, 나는 작은 역할 하나를 맡았다. 수일이 형이 항상 너하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다가도 만나서 보면 뭔가가 부족하니까 다른 사람을 주연에 놓고, 넌 아직 눈빛이 아니야, 말하고 그랬다. (웃음) 그러다 지난해 마침내 널 위한 작품이 완성됐으니까 꼭 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게 <검은 땅의 소녀와>였다.
-드디어 눈빛이 완성된 건가. (웃음) 반가워서 바로 한다고 했겠다. =안 그랬다. (웃음) 시간이 정말 없었다. 결혼을 앞두고 <밀양>도 찍고 있었고, <하이라이프>라는 연극 공연을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못한다고 했는데, 결국은 결혼하고 이틀 뒤에 바로 강원도 태백으로 가게 됐다. 신혼여행은 태백산 민박촌에서 한 거지. (웃음) 근데 수일이 형이 날 딱 보더니 바뀌었다는 거다. 결혼을 하더니 애가 행복해졌다고. 이 역할은 행복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얼굴에 살쪘다고 밥 굶으라 해서 당근이랑 곤약만 먹기도 하고, 심지어 부인이랑 좀 떨어져 있으라 해서 싸운 적도 많았다. (웃음)
-이제는 현실에서도, 기억에서도 사라져가는 탄광촌 이야기다. 실제 채굴장에 들어가서 촬영을 했다고 들었는데, 직접 그 안에 들어가봤나. =광부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체험을 해보자, 해서 실제 막장까지 내려가봤다. 아우… 너무 덥다. 땅에서 지열이 올라오니까. 영화 첫 장면을 보면 광부들 옷이 번들번들하지 않나. 그게 땀에 젖어서 그러는 거다. 거의 사우나 수준에서 탄을 캐내는데, 우리가 이불 털면 먼지들이 뭉쳐서 확 뜨는 것 같은 그런 걸로 완전히 가득 찬 공간이다. 또 굴을 파니까 서 있지를 못한다. 기어 들어가서 탄을 긁어내는데… 영화에 나오는 광부들 모습들은 연출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찍은 거다. 너무 열악한데 이들은 결국 이 일밖에는 할 게 없으니까, 돈 벌어서 다른 데로 나갈 생각을 했던 이들도 돈 다 잃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결국 막장이라더라.
-영화가 한 가족의 비극에 대해 거리를 둔 채 담담히 그려가듯이 최해곤 역시 감정을 읽기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해고를 당할 때나, 진폐증 진단을 받을 때나, 그의 얼굴은 실상 무표정에 가깝다. 역할에 어떻게 접근했나. =감독님이 일단 감정을 못 넣게 했다. 그나마 약간 들어갔다 싶은 것은 다 편집에서 잘라내고. 감독님 의도는 다큐처럼 찍고 싶다는 거였다. 상당히 힘들었다. 표정을 지으면 감독님이 아니야, 지금 뭐가 들어왔어, 이런 말을 하면서 계속 감정을 빼게 했다. 아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니 이게 연기하는 거예요, 따졌겠지만 절친한 사이니까 믿고 따라간 거다. 그래도 감독님은 못마땅해 했다. 아이고, 영진아, 너 정말 왜 그러니, 넌 작품을 생각하는 거니, 하면서. (웃음)
-어떤 장면에서 감독과 가장 많이 부딪혔나. =아들 동구가 없어져서 찾으러 다니는 장면인데, 그때 다리를 좀 절어야 했다. 일을 하다가 다쳤다는 설정인데, 그게 눈에 띄게 절면 또 안 됐다. 근데 다리를 절다보면 아이를 찾는 상황의 긴박감이 떨어지고, 또 긴박하게 하다보면 어느새 다리를 안 절고 있고. (웃음) 또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현장에 모니터가 없었다는 거다. 한마디로 확인이 안 된다. 워낙 저예산이다 보니 자그마한 캠코더를 감독이 들고 찍는데, 그 LCD화면이 모니터다. 그거를 또 햇빛이 반사돼서 잘 안 보이니까 손으로 요렇게 가리고 감독이랑 촬영감독이랑 둘이 보는 거다. (웃음)
-해곤이 누워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보면서 그 언덕의 정체가 뭔지 궁금했다. =그게 석탄하고 돌하고 구별을 하면서, 못 쓰는 돌을 던져놓은 게 산이 된 거다. 내가 그 장면에서 생각한 느낌은 ‘예수처럼’이었다. 빨리 미끄러져 내려오는 게 아니라, 몸이 돌에 찍히고 그 고통을 느껴가면서 천천히 내려오는 거. 돌들이 상당히 날카로워서 손하고 엉덩이, 등이 결국 돌에 다 찍혔다. 그렇게 내려와서 하~ 하고 한숨을 쉬는데 바로 감독님이 컷! 하더라. 또 감정이 들어갔다 이거지. (웃음)
-<밀양>의 조연들이 다들 연극 경력이 상당한 분들이지 않았나. 그런데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영화 연기 어렵다는 거였다. 연기를 하지 않는 연기랄까.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라는 면에서 이창동 감독님이랑 전수일 감독님이 스타일이 비슷하다. 나는 그래도 <밀양>을 찍기 전에 영화를 몇편 찍어서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은 갖고 있었던 편이다. 외국에는 ‘알렉산더 테크닉’이라는 훈련법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의 몸과 의식을 일치시켜 하나로 통합하는 거다. 우리가 보통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잡는다면, 알렉산더 테크닉은 자신의 의식이 통제된 상태에서 모든 행동을 하는 것, 즉 자기 몸을 자기가 다 관찰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서는 거다. 내가 볼 때 영화적인 연기는 이런 식의 훈련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연기 교육 자체에 체계가 없고, 그냥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끌어다가 쓰는 식이니까. 20대 배우가 자기 내면을 성숙시켜 30대, 40대로 올라가는 단계가 아직 한국에는 없는 것 같다.
-<밀양>에서 박도섭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자신이 하느님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이었을 텐데, 쉽게 오케이가 떨어지진 않았을 것 같다. =19번 정도 테이크를 갔다. 내가 시선 맞추기를 힘들어하니까 나중에는 이창동 감독님이 전도연씨 옆에 숨어서 자기를 보고 하라고 하셨다. (웃음) 원래 박도섭을 다른 배우로 했다가 마지막에 감독님이 뒤집기를 해서 나로 결정하셨는데, 바꾼 이유가 바로 그 교도소 면회 장면 때문이었다. 한번 사람이 바뀌어서 신의 영성을 받은 것처럼 피어야 하는데 그거는 연기로 안 되는 부분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30대 초반에 한 2~3년 동안 깨달음을 얻겠다고 산에 다니고 그랬었거든. 감독님이 조영진씨, 당신은 이미 조형은 되어 있다. 꾸미지 말고 그냥 그대로 하라고 말하더라. 아무튼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 장면을 찍었는데, 결국 감독님이 하는 말이 뭐, 앞에 거랑 뒤에 거랑 어떻게 이어붙이면 될 것 같다고. (웃음) 그렇게 죽어라 찍었는데, 이어붙이면 될 것 같네요 하니까 아, 그때의 그 충격, 그 좌절감~. (웃음)
-원래 대학에서 공업경영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연기에 인연이 닿게 됐나. =나는 전문대 출신이다. 고등학교는 공고 나왔다. 장남이어서 돈을 빨리 벌려고 고등학교 3학년 때 공장에 다녔다. 철공소에서 쇠 깎는 일을 했는데 두달이나 월급을 안 주더라고. 안 되겠다 싶어서 급하게 학력고사 공부를 해서 경남전문대학에 들어갔다. 그때 학교에 연극 동아리가 있었다. 첫 공연을 마치고 다방에 들어가 앉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더라. 그냥 줄줄 한 시간 동안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그렇게 울고 난 다음에 아, 연극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연극이 내 길인 것 같다 말했더니 너무 뜨악하셨는지 그냥 해라, 말씀하시더라. (웃음) 군대갔다가 다시 시험쳐서 경성대에 입학했다.
-경성대를 졸업한 다음엔 무엇을 했나. =부산시립무용단에 들어갔다. 90년에 정식 단원이 됐는데, 월급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근데 이게 아침 10시 출근에 12시 퇴근이다. 딱 2시간을 일하는 거다. 그리고 할 게 없으니까 광안리에 모여서 맥주 마시면서 노닥거리고.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사람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년 채우고 사표 쓰고 나왔다. 다들 경악했지. 남들은 못 들어가서 난리인데. (웃음) 그렇게 나와서 집 전세금을 싹 빼서, 연극 입시학원을 세웠다. 근데 다 망했다. 그래서 좀 세속적으로 살아보자, 술집을 차렸는데 그것도 망했다. 다 처분하니까 5만원 정도가 남더라. 그때 결혼도 파탄이 나고 가족이 찢어지고 그랬다.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본래 내가 하던 연극을 하자, 하는 마음에 95년 9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온 다음 바로 이윤택 선생님 밑으로 들어가게 된 건가. =거기 들어가면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하니까. 학교 후배들이 내 선배가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걸레짜서 책상 닦고 운짱 역 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10년을 연극했는데, 포기하려고 한 적도 있다. 연기는 정말 천부적으로 타고나는게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못하지만 공부해서 남이나 가르치자 생각하면서, 대학원을 갔다. 그리고 <시골 선비 조남명>을 했는데 그게 연극제에서 상을 다 받아버린 거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리할 때 반전이 온 거지. 대학원을 선택한 것이 이어져서 강의를 하게 됐고, 올해 9월에 전임강사가 됐다. 결국 지금은 영화도 하고, 연극도 하고, 교육도 하게 됐으니, 우습다 참. 공고 들어가서. (웃음) 연기가 내 삶을 확 바꿔놓은 거다.
-영화로 첫 작품은 <내 안에 우는 바람>이었고, 그 뒤에 <오구>에도 출연했지만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건 <효자동 이발사>부터다. =<내 안에 우는 바람> <오구>는 원래 아는 사람들과 작업한 거였고, 나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다. <효자동 이발사>가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처음 만든 작품이었지. 감독 스타일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부담스럽고 당황스럽더라. 전주에서 촬영했는데, 왜 여관방에서 성인 프로를 막 하지 않나. 극단 생활하면 TV를 잘 못 보니까 그걸 보고 싶잖아. 근데 촬영 끝날 때까지 전혀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웃음) 목욕 쫙 하고, 방에 혼자 앉아서 기다렸다. 일단 나를 깨끗하게 하자, 이거였지. (웃음)
-절대적인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역할이었다. =사실 통치자를 조영진이 한다고 하니까 스탭들이 다들 “조영진이 누구야?” 하면서 영화 망쳤다고 걱정했다. (웃음) 근데 청와대신을 처음에 찍으면서 호흡을 딱 잡으니까 분위기가 바뀌더라. 카리스마가 있다고. 원래 일주일 찍을 것을 4일 만에 쭉쭉 찍고, 나중에 편집에서도 전혀 잘리지를 않았다. 그러다보니 완성된 영화에서 상당히 비중있게 나오게 됐다.
-앞으로도 계속 영화쪽에서 활동하고픈 욕심이 있나. =물론이다.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작업을 해야지. 특별히 무슨 역할을 해야겠다, 그런 욕심은 아직까지는 없고. 너무 많은 게 안 왔으니까. (웃음) 중년의 로맨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품위있고 아름다운. 사극도 하고 싶다. 우리의 멋이나 정신세계를 전달해줄 수 있는 작품을 하면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화면을 떠났을 때 열정이 생기고, 나도 뭔가를 해야지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역할이라면 그게 무엇이건 하고 싶다.
-결혼 뒤에 아무래도 생활에 대한 부담이나 없던 걱정들이 생겼겠다. =하도 고생을 해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웃음) 나이 먹으니까 위가 조금씩 맛이 가는지, 밥을 안 먹어도 이제 배가 별로 안 고프다. (웃음) 집사람도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이 많지 않아서 괜찮다. 집사람과는 연극하다가 만났는데, 얼마 전에 동국대학교 석사를 수료했다. 나는 지금 동국대에 박사과정을 지원해놓은 상태여서, 아내가 학교를 나오면서 내가 들어가는 형태가 됐다. 그래도 도서관에서는 자주 만날 수 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