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미국에서 돌아온 이명세 감독이 <형사 Duelist>를 준비하던 시점부터 <씨네21>이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할 일이 있을 때면 도맡아왔고, <형사…>와 <M>의 개봉 때는 그가 주장하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존중하며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전달 차원에서의 기획기사도 써왔다. 이미 <형사…>를 본 뒤 한번의 거리감을 경험했으며 올해 부산에서 <M>을 본 뒤 그 거리가 좁혀질 수 없는 것임을 확인했음에도 <M>에 관해 “이명세의 필치로 쓴 <율리시스> 혹은 <꿈의 해석>”이라며 비경쟁 영화제의 데일리에 걸맞도록 호감어린 20자평을 쓰고 별 셋을 적은 건 이 영화와 나의 감상 사이에 놓인 공감 때문이기보다 그동안 인터뷰와 현장 방문을 통해 이명세 감독을 만나고 또 그가 가진 열정적인 신념을 확인하면서 갖게 된 깊은 존경심 때문이었다. 이명세는 결코 그의 신념을 쉽게 꺾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이 글을 지지나 동의의 차원에서 쓰고 있지 않다. 그의 집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집념의 산물에까지 동의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고 나의 생각도 변하지 않았으니 쟁점을 제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라리 <M>이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면 이 글은 더 홀가분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독보적인 길을 걸어온 중견감독이 대중의 관심권에서 외면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쨌든 뒤늦게나마 전영객잔이 이 영화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지 않으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에 책임감으로 쓴다.
꿈과 기억, 무의식의 혼란스런 미로
<M>을 몇 차례 보고 나니 의심이 짙어졌다. ‘이 영화에 뭔가가 있다’는 의견들이 내 귀에는 ‘이 영화를 잘 모르겠다’는 곤혹감을 고상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들린다. 혹은 오래되고 익숙한 이야기처럼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는데도 그의 옷을 보지 못한다면 나의 무지함이 드러나는 것이기에 그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애써 속닥거리고 있는 것 같다. <M>이 영화에 대한 탐구인 것처럼 말해지지만 열심히 보아도 나는 <M>이 어떤 ‘영화적 탐구’의 옷을 입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무지의 소치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려고 한다.
<M>에 관한 몇몇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M>은 미로다. 그런데 <M>에는 이명세 영화의 오래되고 순수한 열망이라고 할 만한 첫사랑의 테마가 있다. 게다가 첫사랑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기억 저편에 있다가 돌아온 것이고, 죽어서 유령이 된 여자가 돌아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 앞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현실이 해석해낼 수 없는 존재인 유령과 현실을 극복해내는 상상적 창조자로서의 소설가라는 두 인물의 조건이 어느 면으로도 환상의 미로를 허용한다. <M>이 꿈으로, 기억으로, 소설 속으로, 즉 무의식과 시간성과 가상성의 세계로 번져나가며 어떤 혼란스러운 상태를 이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혼란스런 연쇄를 통해 이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혹은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이끌어가려는지 묻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꿈을 복기하는 대신 영화가 꿈을 그리는 것에 환호하겠는가.
이명세는 관객이 영화를 보고 혼돈에 빠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꼭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M>이 지속적인 교란과 혼란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걸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게다가 혼란스럽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말할 때 유독 미덕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그럼 우리는 또 궁금하다. 그 혼란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영화의 부실함까지도 이 현란한 혼란의 상태 안에서 그냥 용인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민우와 미미가 엄브렐러맨에게 홀려 각자의 동선을 취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엄브렐러맨은 왜 민우를 루팡바로 유인해 미미를 만나게 하는 것과 모순되게 미미를 민우와 떼어놓고 저 세상으로 데려가려고 그렇게나 애쓰는 것일까. 엄브렐러맨의 의미가 아니라 그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 미지의 인물의 행동은 모순이며 그건 영화 <M>의 부주의처럼 보인다.
때때로 <첫사랑>과 <개그맨>의 사례를 들어 지금의 <M>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과거 이명세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는 주장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 의견들이 무관심한 것은 먼저 던져야 할 어떤 단순한 질문이다. <첫사랑>과 <개그맨>과 <M>이 정말 상통하는 영화인지 간단하게 질문하는 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아니 상통하는 지점이 있지만, <M>이 무엇보다 혼돈을 중요하게 끌어안고 표현하는 영화라고 할 때 <첫사랑>과 <개그맨>은 <M>과 비교하여 어떤 혼란이 있던 영화인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사랑>에는 영신의 상상의 나래가 있었고 <개그맨>에는 이종세의 꿈에 관한 일갈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들이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적절한 상상적 강도와 내러티브 사이의 조화롭고 생기로운 화합이 있었다.
플롯의 구조가 부재하는 <M>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왜 <M>은 혼란스러운가? 이 영화가 꿈의 상태를 찍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말장난이 된다. 꿈은 곧장 영화가 아니며, 영화가 꿈처럼 찍혔다는 것의 의미는 영화가 어떤 형식상의 방법을 동원하여 최대한 꿈(혹은 기억)처럼 보이도록 재현했다는 의미이지 꿈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작이라는 과정을 거쳐 영화가 꿈(혹은 기억)이 되려면 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꿈과 영화 사이를 연계하는 필연적 구조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게 필요없다면 어젯밤 꿈을 나열해도 그냥 영화가 되는 것이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으니 곧장 우리는 어젯밤에 내가 영화를 꾸었다고 말해도 괜찮은 것인가. <첫사랑>과 <개그맨>과 <M>을 결정적으로 차이지게 하는 질문. <M>에 플롯의 구조가 있는가.
영화에서 플롯이 중요하다는 건 다름 아닌 이명세의 지론이다. <M>의 이야기가 상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고, 감독 본인이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고 천명한 것 또한 잘 알려진 일이니 그걸 문제삼을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야기(드라마)가 아닌 플롯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감독의 선언은 이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플롯이 중요하다면 역시 또 간단하게 질문하면 된다. <M>에는 그럼 어떤 플롯이 있는가? 그 질문은 이명세의 말을 따라 백번 물어도 정당한 질문이 될 것인데, 꿈과 기억과 시간이라는 상태를 아우르는 이 영화의 환상적 상태들과 그걸 보는 우리 사이의 감각과 감정을 이어주는 교감으로서 그 플롯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M>에서 플롯의 구조를 끝내 찾지 못했다.
플롯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 다른 몇 가지를 본다. 기계적인 캐릭터 아니면 양식화되어 있는 캐릭터, 이를테면 민우와 미미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부조화. 그 인물들이 파생시키는 지나치게 강조된 의미들 때문에 오는 상투성. 양식적인 캐릭터가 이명세의 영화에서 없었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캐릭터들은 항상 양식적이었고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일 정도로 과잉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플롯없는 세상의 떠돌이들은 아니었으며, 쏜살같이 바뀌는 환상의 지속 상태에 이렇게 지나친 의미로 붙잡혀 있었던 적도 없다. 아니, 의미를 배제하는 걸 전제로 한 영화인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렇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이다. <M>은 한편 원천적인 의미를 다루는 영화이며 그 의미의 방문으로서 시작된 영화다. 시종일관 개입하는 것이 첫사랑의 화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도대체 누가 <M>을 두고 의미에 저항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명세만큼 상투적이라는 모든 비난을 무릅쓰고 첫사랑에 관한 원형적 의미에 천착해온 창작자를 본 적이 없다. 첫사랑의 종류는 천차만별일 텐데도 이명세의 첫사랑은 언제나 같은 의미 같은 자리다. 이 영화에서 미미는 그 첫사랑의 상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미과정으로서의 첫사랑과 의미를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환상의 지속 상태가 서로 영화 속에서 조화롭지 않다는 데 있다. 그 관계를 조화시키는 플롯의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속의 상태라고 말했지만 의미는 사이로 불쑥불쑥 개입해서 차라리 우리가 그 상태 그대로를 즐기려고 마음먹을 때조차 방해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꿈처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구조없는 산발성의 형태로 흘러간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민우도 개입하고, 미미도 개입하고, 심지어 은혜도 개입하고, 은혜의 아버지도 개입하고, 그의 부하직원도 개입한다. 다 꿈처럼 흘러간다고 치자. 그럼 이 영화는 그 모든 인물의 꿈같은 모호함을 대변하는 것인데, 과연 플롯없는 세상에서 이것이어도 되고 저것이어도 된다고 말한다면 거기서 영화의 역할이란 어디 있는 것일까.
영화의 탐구가 아닌 테크놀로지의 탐구
공간의 이접과 확장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확장하고 뛰어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오히려 흥미롭다. 그런데 공간이 이접되고 바뀌는 것의 과정을 지켜볼 때 우리의 경험을 유도하고 또 보호하고 있는 장치가 있는가. 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없다며 방치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이 영화의 공간적 축지법은 꿈의 모호함을 반영하기 위한 선택보다 최소 세트로 여러 효과를 주기 위한 경제주의적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더 명확하게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일단의 의견이라고 치더라도 가장 큰 염려는 <M>이 영화를 탐구하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생긴다. <M>이 뭔가를 탐구하고 있다면 그건 영화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테크놀로지를 탐구한다. 이를테면 사운드의 독특한 사용이 많지만 그 사운드들이 돌출되는 자리에서 나는 그 이유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을 현시해낸 기술적 의기양양함을 본다. 여기 덧붙여, <M>의 영화적이라는 것과 상당수 레퍼런스들이 콜라주되어 있는 것 사이에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영화적이기 위해 클림트, 마그리트, 듀안 마이클, 히치콕, 큐브릭 등 그외에도 내가 알지 못할 수많은 참조물들이 필요했다고 보지 않으며, 정작 필요했어도 그것이 영화적인 것의 탐구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다르가 과잉적 참조를 끌어올 때 그게 영화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라면 이명세가 현란한 참조를 끌어올 때 그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효과였을 것이다.
이명세가 말한 플롯을 이야기의 플롯이 아니라 비주얼의 플롯으로 좁혀놓고 이해할 때 <M>의 플롯 부재의 문제는 더 확실해진다. <M>에 이야기가 없는 건 의도이고, 이야기의 플롯이 없는 건 그 차선이라고 할지라도 그럼 비주얼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 비주얼을 주조하는 플롯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이 영화 스스로 혼동하는 것, 그리고 대부분이 혼동하는 것은 ‘비주얼 이펙트의 연쇄’와 ‘비주얼 텔링’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영화에 이야기가 없는 건 비단 이명세만의 특징이 아니다. 구스 반 산트도, 데이비드 린치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도 이야기를 벗어나 이미지와 사운드로만 가능한 영화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논리가 있다. 심지어 데이비드 린치는 “나의 영화에는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논리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영화도 혼돈에 빠지고 “관객도 혼돈에 빠지길 바랐다”는 이명세의 말과는 대치된다. 예컨대 린치의 영화는 영화가 혼란스러워서가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통해 일관된 감정을 주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한편 린치의 꿈과 이명세의 꿈이 다른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의 경험치다. 종종 <M>이 우리를 허탈하게 하는 점은 민우가 모르겠다고 우기는 걸 우리는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걸 관객도 모를 거라고 상정하고 진행한다. 민우가 루팡바에 갔고 미미를 만났다는 걸 알지만 민우가 그걸 모르겠다고 말하니 우리는 혼란스럽다.
그러니까 관객이 <M>을 보고 난해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관객의 탓이 아니라 영화가 그렇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심지어 나는 예를 들기 위해 어떤 숏과 신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할 정도다. 비주얼 플롯이라는, 비주얼 텔링이라는 논리가 부재하기 때문인데, 논리란 여기서 수학적 논리가 아니며 언어학적 논법의 논리도 아니다.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자의식의 표출이 아니라 숏과 신에 의해 운용되는 배열의 논리 혹은 영화적 요소들이 모아져 이루는 감각과 감정과 정서의 논리다.
비주얼 텔링을 무시한 비주얼 이펙트의 추구
반면에 관객이 <M>을 보고 이해했다고 여긴다면 그는 비주얼 이펙트를 보고 환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M>에는 정확히 비주얼 텔링을 무시한 대신 비주얼 이펙트로 대변되는 추구가 있다. 각각의 단위적인 비주얼 효과들 그러니까 플롯없는 상태에서 반복되는 숏들의 이합집산, 빛의 번쩍임, 사물의 변칙적인 움직임, 공간의 축소 및 확장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그것들을 흡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인 것으로 유도하고 있다. 물론 민우와 미미 사이를 이어주는 몇 가지 사물들이 있긴 하다. 이를테면 루팡바의 손잡이와 첫사랑의 그순간에 서로 잡았던 손들의 매치. 그러나 그것이 적당한 순간에, 우리의 감정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리에 배치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결국 <M>의 비주얼 이펙트의 추구는 <형사…>에서 보여주었던 태도를 더 심화하고 있다. 2년 전 이맘때 쓴 글에서 밝힌 생각이지만 <형사…>의 전시성은 고스란히 <M>에서 반복될 뿐 아니라 더 강력하게 재추진된다. 그러니 <M>이 <형사…>보다 더 나아간 지점이 있다면 적은 예산으로 전시성을 과시하다보니 벌어진 현란한 형국이다. <형사…>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애정과 동작을 전시했다면 <M>은 더 나아가 꿈을 빌려 꿈의 혼란함 자체를 전시한다. 마침내 나는 <M>이 영화적인 것을 탐구하기보다 영화적인 요소들을 모아 스스로 영화임을 광고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드는데, 그럴 때 영화는 스스로를 떠나 광고 논리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광고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효과이며 거기 어떤 창의적 스타일이 있어도 그때 우리의 선택은 살(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그건 우리가 염려하는 영화의 어두운 미래다.
나는 차라리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어쩌면, 나는 지금 임금님의 훌륭한 의복을 보고도 보지 못했다고 우기는 아둔한 장님일 것이다. 혹은 <M>이라는, 미래의 영화로서 우리를 구원할 노아의 방주에 탑승할 수 있는 자격을 무지하게도 방금 거부한 것 일 수 있다. 평범한 사고에 사로잡힌 채 이제 곧 침몰할 난파선의 갑판 위에 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지나간 판단은 야만과 시행착오의 기술이기에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진보적인 영화의 도래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나는 영화 보수주의자들의 명단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것에 관해 걱정스런 마음으로 수차례 되돌아보았지만, 그럼에도 나의 대답은 만약 이것이 미래에 올 영화의 진실이라면 나는 기꺼이 영화의 보수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며 이 배의 낡은 갑판에 앉아 함께 난파하는 것이다. 그게 이명세의 신념은 존경하되 그 신념의 산물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힘든 자가 할 수 있는 쓰라린 마지막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