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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낯익은 그 남자의 비밀
정재혁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7-11-15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조성하

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수더분한 인상과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 아래로 깐 눈빛에 가려진 쌍꺼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조성하는 익숙한 인상을 어두운 그림자로 가린 남자다. 스스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사육사인 직업을 통해 동물과 이야기하며, 인터넷 채팅으로만 타인과 소통한다. 어둠에 잠시 빛을 비춰 기억을 더듬으면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박석호, <미소>의 비행 교관이 떠오른다. 어슴푸레하지만 낯이 익다. 지진희의 형이자 문소리의 옛 애인으로 출연했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박석호는 폭력과 협박으로 일관된 인물.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최병철과는 연결할 수 없을 만큼 멀지만 마스크에 잠재된 폭력은 어딘가 풍기는 냄새가 비슷하다. <미소>의 비행 교관은 조금 더 쉽다. 병철만큼 폐쇄적이지만 좀더 내면으로 깊이 패어 있던 비행 교관은 시력을 잃은 사진가 소정(추상미)의 상처를 시리게 어루만진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아니 조성하란 이름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넣어보면 그의 익숙한 얼굴이 어떤 영화 속의 기억이었는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작품이 검색되어 나온다. <거미숲>의 방송사 국장과 <> 여주인공의 삼촌, 그리고 최근 드라마 <황진이>의 엄수. 너무나 다른 캐릭터와 분위기가 한 인물론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렴풋한 그의 이미지가 조금씩 완성되는 듯싶지만 모인 기억의 단편들은 이내 그를 또다시 희미하게 만든다. 조성하,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조성하는 연극을 배우의 예술이라 정의한다. “무대 위에 올라가 한 시간 반, 두 시간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관객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연극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외형적인 이미지를 중시하고, 예쁘게 생기면 꽃미남, 인상이 흉포하면 악역을 맡기는 영화나 방송과 달리 외모로 역할을 구분짓지 않는” 연극은 그가 여전히 무대를 떠날 수 없는 이유다. 생각해보면 그의 어림풋한 이미지도 외모의 경계를 떠나 역할을 고르고 영화, 방송의 구분을 지우고 연기한 그의 이력 때문이 아닐까. 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있으면 조성하란 이름으로 그려지는 인간상, 인간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전도(全圖)가 떠오를 정도다. “어떤 역할이든 다 하고 싶다. 외형적인 이미지로 역할을 결정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다. 중요한 건 인간이 어떻게 생겼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느냐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배우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을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존재다. 그게 배우란 직업이 가진 사명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좀더 의미있는 작품, “배우로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강한 영화가 있다. 시간의 순서로 보면 1997년에 출연한 <인샬라>가 첫 영화 출연작이지만 그는 그보다 6년 늦게 출연한 <미소>를 영화 데뷔작이라 꼽는다. “<인샬라> 다음에 <화산고>를 찍었고, 그 다음이 <미소>다. 물론 <인샬라> <화산고> 모두 감사한 경험이고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영화 데뷔작은 <미소>다. <미소>를 하면서 영화란 장르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이 세계 안에서 좋은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경희 감독님과 함께한 창의적인 작업도 재밌었고, 영화가 조금 편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그는 뒤이어 “방송과 영화는 아직 잘 모른다.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이”라 말했지만, 그가 올해 출연한 드라마 <황진이>에서 보여준 모습은 프로에 가깝다. 조선 최고의 학공 엄수를 연기한 그는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위해 거문고, 가야금, 장구 등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악기를 배웠다. 드라마 1화가 방영된 뒤 인터넷 게시판에는 “국악인인가 보네요”란 시청자 평이 올라왔고, 그가 대사를 하기 시작한 2화 방영 뒤에는 “아, 배우인가보네요”란 게시글이 다시 올라왔다. 황진이의 어머니를 평생 외사랑하는 남자의 쓸쓸함을 표현하는 건 그의 또 다른 숙제였다. “계속 숙제가 큰 역할들을 맡아온 것 같다. <거미숲>에서는 나와 20살 나이차가 나는 남자, <>에선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는 시린 마음을 말없이 몸으로 표현하는 역할 등.” 지금은 <대조영> 이후 방송될 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 세종의 어린 시절을 책임진 인물, 충녕대군의 스승을 연기하고 있다.

조성하는 인터뷰를 위해 앉은 자리에서 <미소> 개봉 무렵 가진 <씨네21> 인터뷰 제목이 “연기밖에 할 줄 몰라 한가해요”였다며 웃음 섞인 불만을 털어놨다. “실제로 그 이후 꽤 심심했어요. (웃음) 들어오는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바쁘다. 2006년엔 <파란 자전거>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등 5편의 영화와 드라마 <황진이>에 출연했고, 7월부터 9월까진 대학로에서 극단 전설의 15주년 기념작품 <아이시떼루>의 공연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숙제를, 인물을 원하는 눈치다. “연기한 지 얼마 됐냐고 물으면 그냥 한 10년 됐다고 해요.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웃음) 저를 신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어서 그냥 저도 아직 신인이라 생각해요. 그런 새로움 때문에 즐겁기도 하고.” 똑 부러지는 이미지가 없어 고민인 듯싶지만 배우 조성하는 매번 색다른 캐릭터로, 인간의 새로운 챕터를 하나씩 들고 찾아올 그런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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