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 종합촬영소 제1 스튜디오. 3일째 영화 <버스, 정류장>의 촬영이 계속되고 있다. 그 큰 스튜디오 안팎으로 정적이 흐르고, 수십명 스탭의 눈은, 처음으로 어린 소녀에게 가슴에 담겨 있던 진심을 말로 꺼내 놓는 남자에게로 향해 있다. 소녀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이 드는 순간에서야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라고 입을 여는 남자.
그동안 강북의 꾀죄죄한 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촬영을 진행했던 이 영화는 처음으로 본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그 남자처럼, 이 춥고 고요한 세트장에서 본격적인 ‘말하기’를 시작한다.
식사도 거른 채 12시간 동안 한 신을 끝낸 촬영팀은 늦은 저녁을 먹고 바로, 낙태수술을 하고 돌아온 소녀와 남자가, 남자의 방에서 본심의 언저리만 더듬는 얘기를 나누다가, 잠이 든 남자 뒤에 앉아 그만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신을 이어서 진행했다.
카메라 위치와 구도가 결정되고, 이어서 조명 세팅으로 서너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을 준비하고 누워 있는 남자와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의 연기가 시작된다. 소녀가 조용히 흑흑거리다가 이젠 소리내어 운다. 등을 뒤로 하고 누운 남자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듣고만 있다.
또다시 수십명의 스탭들은 소녀의 울음 연기를 듣거나 본다. 누구는 카메라 위치가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할 것이고, 누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혹시 과장된 것은 아닌지 걱정할 것이고, 또 누구는 주변의 소음을 염려할 것이며, 또 누구는 소녀의 연기에 다소 감상적인 기분이었을 것이고. 또 누구는….
2분이 넘게 흘렀다. 슬쩍 연기자 앞에 앉아 있는 감독을 보았다. 그녀는 웬일인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울음 연기를 하는 소녀를 끝까지, 낱낱이 보지 않았을까.
2번 만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별 얘기없이 그 신은 마무리되었다. 울음 연기를 끝낸 여배우는 잠시 벽에 기대서 있었고, 남자배우는 다소 썰렁한 농담을 하며 촬영장을 떠났다. 사람들은 감독에게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 바라보면서, 콘티북을 들여다보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얘길 나누지만 정말 감독이, 배우가 제대로 진짜 표현하고 싶은 것,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 정확하게 이해되거나 완벽하게 소통될까? 새벽 5시의 촬영현장에서, 진짜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채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떤 여자가 지금 “수제비가 먹고 싶어”라고 얘기했다면, 어떤 이는 ‘배가 고픈가 보군’ 할 것이고, 그녀의 수제비에 얽힌 특별한 과거 사연을 알고 있는 이라면, ‘옛날 생각이 나나 보군’이라고 해석할 것이고, 또 누구는 ‘밀가루를 좋아하나 보군’이라고도 생각할 것 같다. 생각건대, 그 여자의 진심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알려고 노력할수록, 적어도 오해나 몰이해의 수치는 낮아질 것 같다.
별말없이 조용조용히 빛이 완성되고, 그림이 만들어지고, 몇 마디의 대사가 울리던 그 고요한 세트장에서의 저들은 서로의 진심을 알고 싶기는 한 걸까. 감독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을까, 라고 궁금해졌다.
불현듯 그들의, 진짜 마음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