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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폭탄
2001-10-31

<킬러들의 수다>에 자극받은 아저씨, 카뮈와 테러리스트를 생각하다

● 서양제든 조선제든 일본제든, 겨자를 주식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절한 자리를 찾은 겨자는 그 톡 쏘는 맛으로 음식 맛을 풍부하게 하고 질림을 막는다. <킬러들의 수다>도 내게 그랬다. 4인조 남성 킬러단의 몽환적 무용담을 따라가며 나는 시간 반 즐거웠고, 내 밋밋한 일상은 적절한 자극을 얻었다. 장진 감독의 장점은 자기갱신력인 것 같다. <기막힌 사내들>은 머스터드 같았고, <간첩 리철진>은 머스터드에 조선 겨자를 섞은 것 같았는데, <킬러들의 수다>는 머스터드와 겨자에 와사비를 섞은 것 같았다. 쏘는 맛이 진해지며 다양해졌다는 뜻이다. 자기를 갱신할 줄 아는 사람을 당할 자는 없다. 시간이 그의 편이기 때문이다. 벌써 장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킬러는 의뢰인에게서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살인행위가 지닌 의미에 무심하다. 반면에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살인행위에 깃들인 의미에 민감하다(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넓게 이해하면 킬러도 거기 포함되겠지만, 여기서는 이 말을 일정한 대의에 헌신하는 정치적 킬러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로 하자). 테러리스트의 의뢰인은 흔히 민족이나 민중 또는 이념 같은 추상적 주체다. 이들이 받는 보수도 영예나 자긍심 같은 추상적 자산이다. 그래서 흔히 지적되듯, 한쪽에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을 다른 쪽에서는 자유의 투사라고 부른다. 이들은 <킬러들의 수다>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비장하고 진지하다. 내게는 안중근이나 이봉창 같은 이들이 그런 비장하고 진지한 테러리스트의 전형으로 떠오른다. 문학작품 속의 테러리스트들 역시 대체로 비장하고 진지하다. 그들 가운데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은 사람들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로운 사람들>에 나오는 테러리스트들이다. 사실 나는 <킬러들의 수다>를 보며 엉뚱하게도 그 위에 <정의로운 사람들>을 포갰다. 로맨틱 킬러 정우(신하균)가 자신이 죽여야 할 여자의 얼굴을 본 뒤 일을 그르치게 되는 대목이 고리가 된 것 같다.

1905년 러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았다는 <정의로운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엇갈린 관점을 지닌 테러리스트들을 등장시킨다. 한쪽 끝에는 혁명이 시라고 생각하는 칼리야예프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오직 폭탄만이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스테판이 있다. 이 두 캐릭터는 제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칼리야예프는 “내가 확신할 수도 없는 먼 미래 세상을 위해 지금 내 형제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후려치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스테판은 “땅 위의 단 한 사람이라도 감옥에 있는 한, 자유는 내게 또다른 감옥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차르의 숙부로서 인간 도살자라고 불리는 세르게이 대공을 살해할 임무가 칼리야예프에게 주어진다. 마차에 탄 대공에게 폭탄을 던지려던 칼리야예프는 대공 옆에 그의 어린 조카 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친다. 이 일을 놓고 테러리스트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여성조직원 도라는 자신들이 던진 폭탄에 어린애들이 죽는 순간 조직은 권위도 영향력도 완전히 잃을 것이라며 칼리야예프를 옹호한다. 작품 전체를 읽어보면 카뮈가 칼리야예프와 도라 편인 것은 또렷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스테판에게도 충분한 발언권을 준다.

스테판이 말한다. “야네크(칼리야예프)가 그 두 아이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수천의 러시아 아이들이 앞으로 몇년 동안 두고두고 굶주려 죽을 텐데. 어린애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자네들 본 적 있어? 나는 봤어. 그런 죽음에 비하면 폭탄에 맞아 죽는 것은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지. 그러나 야네크가 본 것은 그런 아이들이 아니야. 그저 대공의 재롱둥이 강아지 새끼 두 마리일 뿐이지. 그러고도 자네들이 과연 인간인가? 그저 그 순간만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인가? 그러면 차라리 자선사업이나 하고 그날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나 하는 게 나을 거야. 혁명은 아예 그만두란 말이야.”

명예란 화려한 마차를 소유한 족속들만 누리는 사치라는 스테판의 생각과 명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재산이라는 칼리야예프의 생각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칼리야예프는 이틀 뒤 대공의 머리를 날리고 체포된다. 특사를 미끼로 그를 전향시키러 온 대공비에게 칼리야예프가 말한다. “만약에 죽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가 정말로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칼리야예프 생각에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념을 위해 죽는 것이고, 그것만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길이다. 그는 교수대에서 죽음으로써 그 일에 성공했다.

쌍둥이 빌딩으로 비행기를 몰아간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했다. 칼리야예프는 이들에게서 또다른 자신을 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대공이 아니라 대공의 조카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미친 살인자일 뿐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아저씨의 귓전에 스테판의 항변이, 굶주려 죽는 러시아 아이들의 신음이 울린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신음이, 이라크 아이들의 신음이, 무수한 제3세계 아이들의 신음이.

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